21/07/31
요즘엔 허구와 사실이 구분되지 않는 경계을 마주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아마 앞으로 이런 기회는 점차 늘어날 것 같다. 어제까지만 해도 즐겁게 교류하던 친구의 상실이나, 코로나, ISIS 등 게임의 시나리오적 배경에서만 볼 줄 알았던 상상만 해본 상황의 현실화 등등.
내가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모두 과거의 내 경험에 기반할텐데, 죽을 때까지 노력을 해도 나는 세상에 있을 모든 케이스를 직접 경험할 수 없다. 다만 미디어가 발달하고, 나의 관심사도 점차 넓어지기에 새로운 것들을 점점 더 많이 접하는 것일 뿐이다.
반면 특히 소설 등에서 접하는 허구 중 너무나도 사실같아서 구분할 수 없는, 그래서 오히려 굳이 구분해야 하나싶은 작품들을 접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생각이 들 정도의 작품이라면 이 작가는 솜씨가 좋다고 해야겠다.
시선으로부터는 내용의 모든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이전까지 접한 소설들은 읽으면서 항상 이건 어떤 뜻일까 이 장면은 왜 여기 나왔을까 이런 생각에 내내 골몰하면서 읽었던 것에 반해 이 소설은 그런 생각을 할 새 없이 그냥 흘러가는대로 멍하니 끝까지 넋을 놓고 봤다.
실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주르르 보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실화인지, 실존 인물인지를 진지하게 인터넷으로 찾아봤을 정도였다. 세련되기도 했고, 최근의 시점을 기반으로 소재들도 내 주변의 것들이라서 영향을 준 걸 수도 있겠다 생각해보기도 했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지니는 가치관, 그리고 생각하는 방식에서 나와 많은 공통점을 느낀 것도 한 몫 하기 때문인 듯하다.
무언가를 추구할 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주변의 흐름을 비교해서 둘 중에 우위를 두는 비중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고 생각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자에 대부분의 비중이 몰린, 개성이 굉장히 강한 캐릭터들이었다. 예술인 가족 답다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자기만의 줏대가 있는 사람들. 그렇다고 거슬릴 정도로 외통수정도까지는 아닌 사람들.
시선으로부터라는 제목이 말하듯 그리고 이 특성은 모두 심시선으로부터 발현되었다. 비록 그녀에 대한 직접적 설명은 조금도 나와있지 않지만, 매 화 마다 서두에 소개되는 그녀의 인터뷰 기록이나, 그녀의 글이 간접적으로 그녀를 소개한다.
소설 맨 앞 장에는 가계도가 소개되어 있다. 적지 않은 인물들이 소개되었고 그것보다도 구성원 관의 관계가 보통의 가족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었기에 필요했다. 인물들이 꽤 많은 편이어서 이따금 맨 앞장으로 돌아가서 장면 속 인물들의 관계를 계속해서 찾아보았다.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각 파트마다 인물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해주었고, 덕분에 다 읽고 난 시점에서는 모든 인물간의 관계과 각자의 특성이 머리에 완벽하게 담겼다. 플롯도 되게 멋졌다.
소설에는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사회문제도 소개되었다. 아동학대, 사진신부 등. 방조자 역시도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등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독자에게 단순한 재미만이 아닌, 사회상을 한 번 돌아보게 함으로써 우리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역할도 이 소설은 하고 있었다.
줄거리
할머니 심시선이 타계한 지 10년이 지날 즈음 문득 가족들은 그녀의 제사를 한 번 지내자고 한다.
장소는 할머니께서 지낸 적이 있었던 하와이. 이게 이유라기보다는 미국에 있는 가족도 오기 편하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고, 최근에 발견된 할머니가 등장하는 작품이 하와이에서 전시중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제수 대신 각자가 하와이에서 시간을 보내며 얻은 것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을 제사날 당일 다함께 공유하기로 한다.
그렇게 제목대로 시선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자라온 그의 후손들은 함께 하와이로 건너가 며칠간을 생활하며 여정을 즐긴다.
누구는 커피를 좋아했던 시선을 위해 하와이 산지에서 신선한 커피를 구하기도,
누구는 인기가 좋은 팬케잌이나 도넛을 신선하게 가져오기도, 훌라춤을 선보이기도 한다.
나라면 무엇을 가져올지를 생각해봣을때 가장 가장 가깝게 느꼈던 우윤이라는 인물은 하와이 체류동안 배운 서핑을 마지막 날에 가까워 겨우 성공한 자신이 탔던 가장 멋진 파도를 담아와 내민다.
그리고 마지막 날 그들은 마치 무언의 약속마냥 다함께 할머니의 그림이 전시되어있는 미술관에 함께 방문한다. 누드화이기에 약간 거북할 수도 있으나 그들은 그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그림 속 할머니의 표정에서 의미를 찾기도 한다.
외부로부터 소개받은 내용
소설이 하는 일은 무리짓고 카테고리 나누는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편 상대방의 입장, 관점을 소개해주어 그들을 이해하게 하려는 역할을 한다. 소설은 타인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전해주어서 직접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간접 경험을 통해 헤아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에도 의의가 있다.
옴니버스형식의 특징은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끝에서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라는 것이다. 마치 모자이크처럼 파편 파편을 모아서 시선을 나중에 완성지어볼 수 있는 모습. 하지만 이 특성상 다양한 이야기로 인해 소설의 집중도가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소설은 맨 처음에 화두가 제시되어있다. 이들이 마지막에 하와이에서 함께 모여 제사를 지낼 것이라는 것. 서두에 제시된 이 화두 덕분에 이 소설은 집중도를 유지한다.
장편소설을 구성할 적에 틀을 한 번 잘 갖춰 놓는다면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자유롭고 멋지게 구성할 수 있다. 시선으로부터는 울타리를 잘 친 성공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결혼에 대한 정의를 되새겨볼 수도 있다. 최근의 사례를 보면 감정적인 연대가 결혼이라는 걸 잊고 경제적인 조건만을 위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잦다. 작품 속 오상헌은 상대방의 감정의 변화를 견디는 것조차 감당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게 바로 결혼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건강한 결혼 관계를 비추어 준다.
(그녀의 페미니스트라는 타이틀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의 본 취지는 억압되지 않고 동등한 균형을 갖자는 것이지 그동안 억압되었으니 이제는 반대로 우리가 우월해지자라는 메시지가 아니다.
-> 이 관점에 대해서 바라본다면 페미니스트는 소수자들에 대한 다수의 존중이라는 관점으로 옮겨가도 좋을 듯하다.
결론 및 배울 만한 점
문체, 플롯 모든게 마음에 들어 작가를 검색해보았다. 마침 그의 다른 작품이 드라마화된 덕분에 유퀴즈온더블럭에 출연한 적이 있는 작가였다. 그 곳에서 글 잘 쓰는 법에 대한 질문에 대해 다음의 내용으로 답한 걸 보았다. 모두 허구라는 장르에 사실감을 불어넣기에 아주 좋은 교훈이라고 느꼈다. 오래도록 참고하려고 한다.
-내 주변의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과연 당연한지 생각해보라.
-악당의 이름을 나는 스팸메일함에서 찾는다.
-읽는 사람은 죽기 전에 천 번을 산다.
소설은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것 보다도 모르던 감정에 대해 알게 하는 것이다. 내 감정에 대해서 오롯하게 잘 드러내보자.
밑줄쳤던 장면 (표현법이 멋졌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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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3 추적할 수 있는 빵 부스러기는 사방팔방에 존재했다.
P.125 누구에게나 공격성은 있지만, 그것이 희미한 사람과 모공에서 화약냄새가 나는 사람들의 차이는 컸다.
P.168 (문장의 아취가 독특하다고 시선에게 말하는 사회자에게 대답) 아마도 바닥에 떨어진 그릇처럼 깨져 있기 때문일겁니다. 사람들은 의외로 흠 없는 것만큼이나 완전히 파괴되었다 다시 이어붙인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니까요.
-> 의도된 게 아니라 우여곡절을 많이 겪으면서 깨지고 다시 붙고 묘한 모양새가 되었다. 하지만 상처를 훼손으로 인지하지 않고 삶을 지나는 과정으로 생각하는 모습. 그게 나를 이루는 무늬가 되었다고 말하는 모습이 멋지다.
P.200 오래된 땅을 파들어가는 사람과 새 땅의 표면을 살피는 사람이 그렇게 작은 선물을 교환했다.
P.291 우윤과 똑같이 물에 흠뻑 젖은 죽음이. 어린 시절 그렇게 두려워했던 대상이 투명한 팔을 우윤의 어깨에 잠시 두르고 기이한 격려를 해 주었다… 우윤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두려운 행위 중 하나를 그럭저럭 해냈다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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