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07
Phonetic vs Artistic
문자와 마찬가지로 예술 역시 한 갈래의 언어이다. 전자가 정보교류를 위한 것이라면 후자는 관념의 교류에 사용된다.
문자에는 객관적인 정보를 담을 수 있고, 발신자로부터 수신자들에게 정보가 전달되는 동안 손실이 일어나거나 왜곡되는 일 없이, 그리고 동일한 정보를 받은 수신자들 간 받아들이는 의미가 서로 다르지 않도록 하는데 주목적이 있다.
반면 예술가는 예술언어에 객관언어가 담지 못하는 추상의 영역을 담는다.
이를테면 첫사랑을 집에 바래다주고 오는 어느 좁은 길목 하늘에서 발견한 보라빛 노을, 달콤한 냄새, 옅은 땀이 증발하면서 느끼는 기분 좋은 현기증
/ 가까운 누군가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어느날 우연히 그와 자주 지나던 길목의 어귀에서 불현듯 그의 존재를 느끼는 경험.
이러한 기억을, 이러한 심상을 추상을 예술에 우리는 담는다.
언어 속에 작가가 담은 내용들은 당연히 모든 수신자들에게 완벽히 닿지 못한다. 작가가 쏟아부은 모든 색깔을 오롯이 온전하게 알아차리는 수신자는 1명 나오기도 어렵다. 문자언어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예술언어는 실패한 시도일 수 있지만, 이 드문 상황은 오히려 우연히 마주치는 나와 서정이 같은 작가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에 엄청난 찡함과 반가움을 선사한다.
한 찰나를 공유하는 듯한 이 느낌.
이제까지 관념의 교류수단으로 글은 그다지 좋은 통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편견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예술이긴 하지만 문자를 사용한다는 점을 지우지 못하고 봤던 까닭에 생긴 듯하다.
이번 작품은 확실하게 문자답지 않은 서술이 가득차 있었다. 그림같기도, 음악같기도 한 내용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래서 표현된 내용 중 몇은 이해하는데 실패하기도 했지만 보통의 글 답지 않은 소설을 발견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줄거리
주인공 아키 레빈은 작곡가이다. 영화음악 분야에 몸담고 있다. 아직까지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잘 만난 사람들 덕분에 좋은 기회를 얻기도 했고, 형편걱정 없이 좋은 곳에서 잘 지내고 있다. 다만 함께하던 아내가 뇌졸중으로 요양원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홀로 지내고 있다. 그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남편이 면회오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그 이유로 레빈은 요양원을 가볼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다. 이번에 새로 성인용 애니메이션 ost 제작의뢰를 받아 작업을 시도하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업무적으로도 잘 풀리지 않고 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라는 행위예술가가 관람객과 마주앉아 서로의 눈을 응시한채로 명상 비슷한 체험을 해보는 퍼포먼스를 MOMA에서 진행하고 있다. 각자마다 짧은 혹은 긴 시간동안 앉아있으면서 시선을 교환하는데 대부분 마리나의 눈동자 속에서 자신이 그간 인지하지 못했던, 마주할 생각을 하지 못한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기획의 의도에는 '드러내는 것' 이라고 표현되어있는데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내 자신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75일간 진행되는 동안 주인공은 전시가 진행되는 방 안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 직접 긴 줄에 합류해서 마리나와 마주해볼 시도는 하지 않는다. 남들이 앉아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무엇을 얻는지, 느낌이 어땠는지를 굉장히 궁금해하기만 할 뿐이다.
어느날은 전시를 관람하던 중 제인이라는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녀는 남편 칼을 떠나보내고 힘든 시절을 보내던 중 뉴욕으로 잠시 여행을 와 있다. 그녀 역시 머무르는 동안 계속해서 전시관을 찾아 마리나를 마주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녀는 은퇴한 미술선생으로 직접 예술품을 창작하지는 않지만 관심이 많다. 오히려 바깥에 있기 때문에 예술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그에게 선생같은 역할을 해주며 그에게 의자에 앉아볼 것을 서서히 제안해본다. 그녀와의 짧은 교류에서 무언가 도움을 받은 덕분에 계속 시작하지 못했던 음악 작업도 차츰 시작된다.
체류시간이 2주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제인은 곧 뉴욕을 떠나게 되고 그 즈음 레빈은 그의 가까운 지인인 힐라야스에게 드디어 연락한다. 그녀가 전에 마리나의 건너편에 앉아있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는데 어떤 경험이었는지 후감을 물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리나 앞에 앉아있을 당시에 바로 물어보지 않았던 건 분명 말을 트면 이야기가 자신의 아내에 대한 것으로 흘러갈 게 뻔했고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동안 힐리야스는 그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아내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에게 용기를 많이 실어준다. 덕분에 작업도 속도가 붙고, 아내에 대해 이야기나누는 데 대한 거부감도 줄어들면서 주인공은 점차 개선되어간다.
닫았던 마음을 점차 열고 딸을 만나서 아내 소식도 듣고 힐라야스와도 조심스레 가족 이야기를 나눈 그는 드디어 전시의 마지막 날 긴 대기열에 일찍 서서 드디아 마리나와 마주한다.
한참을 마주했던 그는 그가 이제까지 외면했던 것들과 마주하고 뭔가 깨달은 바를 느끼고는 아내를 찾아간다. 그리고 의외로 너무나도 쉽게 주인공은 아내를 만난다. 그리고 사과한다.
후감
관념의 표현에 관하여 :
육체적 죽음 뿐 만 아니라 심리적 단절에서도 나는 죽음도 느낀다. 육체가 죽지 않았더라도 교류가 끊기면서 예전 소통하던 그 모습을 상대방이 잃은 경우 나는 그 모습에서 죽음을 느낀다.
반대로 상대가 작고했더라도 과거 그와 함께한 추억이 깃든 장소를 방문하거나, 함껴 경험한 어떤 순간 특유의 뉘앙스가 풍겨지는 음악, 온도, 냄새가 나면 나는 그를 마주한다.
상대방을 의식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전적으로 내게 달려있다. 다른 사람이 느끼는 특정 인물에 대한 인상은 나의 그것과는 같을 수가 없다. 그가 가지는 의미는 내가 그를 의식함으로써 생기지 그 전까지 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게 존재는 기억이다.
나와 죽음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은 아직 없다. 그런데 이 작품 곳곳에는 이 관념이 넓게 퍼져 있었다. 그래서 유독 더 짙게 감상할 수 있었고 표현들이 내게 더 친근하고 효과적으로 다가온게 아닌가 싶다.
소설에는 마리나의 앞에 선 사람들이 느끼는 몽환적인 내용들이 가득 담겨있다. 사실 모두의 감상을 다 공감하진 못했다. 무슨 말인지 어떤 느낌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오히려 이 부분에서 (내가 모든 것을 공감할 수는 없기에) 더욱 이 소설에서 예술의 여운을 느낄 수 있었다.
글씨로 적혀진 것중에서는 이렇게 관념에 대해 깊이 공감할 만한 표현을 발견한 건 이 책이 처음이었다.
그 외에 나와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의 행동에서 공감을 하기도_(아내가 오지 말래서 주인공은 요양원에 갈 생각을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이 부분은 내가 대신 억울함을 느끼기도 했다.)
나와 다른 모습의 사람에서도 신기함을 느끼기도 했다_(마리나 앞에 마주한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기가 직접 경험하는 것도 아닌데 그걸 왜 바라보는지, 그리고 그걸 자기에게 특정한 의미로 부여하려 하는지 잘 모르겠다. 행위 자체를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모습을 상세히 소개받기도 했는데 그 모습에서도 재밌는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예술가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항상 즐겁다.)
함꼐 읽은 다른 분께서는 제인의 역할에 주목해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분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이 소설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레빈에게 큰 영향을 미치며 레빈 뿐 만 아니라 주변 모두에게 도움을 준다. 하지만 정작 본인 자신은 결핍되어있고, 마리나와도 결국 마주하지 못한다. 그녀가 앉았더라면 칼과의 다른 관점의 대면을 했을텐데 결국 그녀는 앉지 못한다.
배울점
소설의 큰 방향과 닿지 않는 소재의 등장이 이번 소설에는 유독 잦았다고 느꼈다.
다 읽고 나서 문득 중간에 소개되었던 이건 어떻게 된거지? 싶어서 찾아보면 그냥 그대로만 존재하고 어떻게 발현된 게 없는 경우가 몇 있었다.
모든 것을 결론으로 이을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갈래로 제 역할을 하는 걸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쓰는 관점에서 본다면 너무 작은 소재 하나하나에 가시적 당위성을 붙여야 한다는 압박을 가지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릇에 담긴 메시지로 나는 예술을 바라본다. 메시지가 누군가에게 전달되려면 어떤 매질에 담겨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상대방에게 흡수되지 않는다. 이 때 메시지와 그릇의 관계가 중요한데, 제아무리 좋은 메시지더라도 그릇이 형편없다면 상대방에게 전달될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좌초될 수 있고, 반대로 그릇이 너무 과하게 화려하다면 독자의 시선은 메시지에 닿지 못한다. 그래서 둘의 관계의 황금 비율을 찾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그 비율의 고유성, 나만의 비율을 찾는 것이 큰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번 소설은 정말 술술 읽혔다. 사건들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책은 좋게 느껴졌다. 메시지에 오해없이 내게 오롯이 잘 전달되었다. 사건을 잘 다뤄서 흥미진진하게 느낄 수 있게 되어있기도 했고(그릇), 인물 내면의 심리도 잘 비추어서 진지한 내용도 잘 전달된 덕이기도 했다.(메시지)
단순히 재밌기만 하지 않고 좋은 내용도 잘 담긴 완성도 높은 이야기이다.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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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 사실 그는 악상이 떠오르길 기다리고 있다. 보통은 여기선 내가 등장하지만 레빈은 벌써 몇 달째 온전한 상태가 아니다. 곡을 쓰려면 조각난 꿈의 늪을 뛰어넘어야 하는데 뛸 때마다 매번 목표에 못 미친다.
-> 예술가들의 고뇌가 잘 느껴진다.
p40 그는 밤의 심연을 몸서리치게 두려워했다. 자신이 두 발로만 땅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걱정했다. 충분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어둠에 대한 공포를 공감되게 추상적으로 적은 표현. 우아하다고 느꼈다.
p 77 며칠 후 그것이 실은 자기 칫솔이었음을, 하지만 리디아 것과 비교해야만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이 무언가의 상징이 아닌지 걱정됐다. 리디아 없는 그는 누구란 말인가?
p87 모든 예술은 한 시대에 속한다. 굉장히 짧은 기간동안 향유되는 경우가 많다.한 예술가의 작품 목록에서 긴 시간이 보이는 것은 예외적인거다. 이러려면 뭐든 하는 동안 자신을 믿어야 한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보면 자연히 다시 나아가게 될 것이다.
p89 예술가들이 진정한 만족을 느끼는 순간은 굉장히 드물다. 작업에 푹 빠져 있을 때, 색체 또는 움직임 또는 소리, 혹은 언어 또는 점토 또는 그림 또는 춤 안에 있을 때, 자신을 완전히 예술에 내맡길 때, 이때가 드들이 두가지를 알 때다. 삶이라는 공허와 죽음이라는 인력. 웅장한 것과 텅 빈 것, 최고의 작품에는 이것이 반영되어있다. 이 같은 진실의 선지자가 되는 데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 그 갈채의 심연을 향한 열망에 초연함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술가들은 영원히 배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린다.
p173 레빈이 그간 방해물이었던 자기 자신을 치우고 음악에게 길을 내줬으므로 나는 뉴욕을 떠나는 제인을 보러 갔다. 세상에는 예술가가 있고 조력자가 있다. 나는 조력자들을 축복한다. 그들은 창작 과정의 윤활유다.
p 201 역사적으로 예술가의 역할은 우리를 자극하고 색깔이나 질감이나 내용으로 시선을 끄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유튜브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어쩌면 예술은 우리에게 사색, 심지어는 정지의 힘을 일깨우는 뭔가로 진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p290 가벼운 새 몸을 갖게 된 다니차는 자신의 장례식 다음날 마리나가 그녀의 아파트를 정리하러 갔을 때도 거기 있었다.
-> 죽음에 대한 신선한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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