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후감

태고의 시간들 - 올가 토카르축

20/03/23

 

 정말 오랜만에 깊이 심취해서 즐길 수 있었던 책이 되었다. 까뮈, 가브리엘 마르케스 다음으로 작가의 서정이 나와 가깝게 느껴졌다. 한 장 한장 소중히 꼼꼼히 읽어보았다.

  가상의 도시 안에서 폴란드 역사가 지나가는 배경 속 죽음, 허무함 등에 대하여 소설은 다루고 있다. 
사물의 의인화, 물질적 죽음이 아닌 기억 속의 죽음에 대한 관념 제시, 번역서임에도 전해지는 재치있는 표현들 등의 수많은 보물들이 초코칩 머핀 위의 초코처럼 엄청 밀하게 적혀있다. 
중간중간에는 작가의 방대한 배경지식들이 본드처럼 적재적소에 등장해서 이야기 사이를 메운다. 새로운 것을 아는 재미도 있다.

 내가 언젠가 굉장히 몽환적인 상태에서 생각해보았던 개념들, 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거나 비정상같아보여 드러내지 못했던 상념들 조각조각을 많이 만났다.  
 이러한 표현법들이 대중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내게 대리만족과 같은 안도감을 전해주전해주기도 했다.

 마침 폴란드 작가이고, 쇼팽의 작품을 좋아하기에 문득 민족적 고유한 공통적 분위기에 의해 그 폴란드적 감성이 나와 맞기에 두 작가에게서 특히 공감대를 느끼는 건가 하는 생각도 잠깐 해보았다.
그냥 단순히 귀납적 연관성을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간접적으로 민족성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유의 서정이 있는데 그걸 내가 느낀걸까. 답을 내리기 위해 다른 소설도 후속으로 읽어보아야 겠다.

 칸트가 열거한 미학의 본질 중 '타인의 동의를 구하려는 시도'라는 말이 계속 맴돌기도 한다.
음악이던, 그림이던, 소설이던, 영화이던, 이케아에서 마음에 드는 가구를 찾던 모두 나는 나와 닮은 점이 있는, 내 틀과 아구가 맞는 것을 찾으려고 한다. 이게 내가 아름다움이라고 여기는 것이라는 걸 태고의 시간들 덕분에 다시금 환기할 수 있었다.

 불교에 관심이 많은 작가라고 들었고 그리고 실제로도 이해가 되는 대목이 굉장히 많았지만 다 읽고 나서는 오히려 다음의 성경 글귀가 문득 떠올랐다. 소설에서 느낀 느낌이 딱 이러했다. 
두 종교 모두 수많은 현인들의 깊고 심오한 고뇌를 바탕으로 하여 이룩되었을텐데 역시 모두 같은 인간이기에 죽응메 관하여서는 고심의 결론이 비슷한 방향으로 수렴하는건가 싶기도 하다. 

---------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한다
 이미 있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

기억에 남는 표현 및 내용들

* 상속자는 침대에 누워 뭔가에 시선을 고정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너무 끈적거렸다. 방 안의 사물들을 이리저리 훑고 지나가다가도 그 중 하나에 파리처럼 주저앉곤 했다.

* 물까마귀는 그해 8월 보드카로 피가 지나치게 묽어지던 날,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

* 그녀가 죽는다는 것은 모든 그녀의 레시피가 사라진다는 뜻이고 닭의 간과 순무를 넣어 만든 그녀만의 특별한 샐러드와 초콜릿 크림을 끼얹은 케이크와 생강 과자 또한 영원히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종국에는 그녀의 생각과 말, 그녀가 직접 겪고 몸담았던 모든 일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 내게 소설쓰기는 나 자신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일이 어른스러운 방법으로 변형된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옛날이야기를 떠올리는 것 처럼. 

- 올카 토카르추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