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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관람기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 국현미 덕수궁관

21/03/06

 

1930~40년대 우리나라 예술과 문학이 서로 교류하던 모습을 주제로 한 전시가 진행중이다.
 
식민지사회라는 모순성, 급속도로 보급된 서양의 신식 문물과 전통적 가치관들의 충돌 등 여러 상황이 번잡하게 교차하는 환경 속에서 태어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전시장 초입에 다음과 같은 이상 시인의 말이 소개되어 있는데, 어쩌면 아이러니하지만 이러한 절망적 상황에 자극 받아 당대 예술가들은 더욱 열의를 태운 건 아닐까.
 
'어느 시대에도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때문에 절망한다.’
 
당대 활동했던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 중 다음 작품에 주목했다.
 
# 정종여 - 남해기행 스케치
최소한의 연필자국이 우리에게 친근한 고향 뒷산이나, 마을 모습을 이루는 모습이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닮고 싶어서 따라해보고자 여러 장 사진을 찍어왔다.
 
# 정지용이 조풍연에게 선물한 글씨
나무 엮어 보금자리 만들고
혼례치뤄 가인 맞아,
나무열매 먹으며
오래오래 사시오.
 
*지인의 혼인을 축하하는 시였는데 꾸밈 없이 소박하게 적힌 메시지 너머로 진심을 담은 축복이 느껴졌다. 예술가다운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 임화 - 지구와 빡테리아
내용도 근사했지만, 지금과는 호환되지 않는 당대의 띄어쓰기 없는 문법, 이질적인 문법과 단어 등에 담긴 과거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술도 결국은 당대를 반영하는 타임라인의 역할도 가지겠구나, 거꾸로 그렇다면 나는 지금 상황을 어떤 언어로 담아볼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 장발 - 성녀 김골룸바와 김아녜스 자매
유럽 여느 유명한 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서나 볼 법한 종교화에 한복과 한국적인 요소가 가득 담겨있었다. 쩅한 포스터 같은 화면 때문이었는지 보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기법과 소재의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친근한 느낌을 받았다.
 
# 정현웅 : 소몰이
소의 모습만을 주로 즐겨 그렸다고 한다. 함께 전시되었던 어떤 작품은 왜 소인지도 모를 정도로 어지러운 작품도 있었는데, 이 작품만큼은 빛깔, 섬세한 모 표현, 눈매 등이 굉장히 친근한 느낌을 받았다. 전쟁통에 단명했다는 사연이 소개되었는데 이 사연 때문에 더 애틋하게 감상한 걸지도 모르겠다.
 
# 최재덕 : 농가
특유의 희뿌연 기법 속에 담긴 초가집의 둥글둥글한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다. 어디선가 낯이 많이 익은 분위기인데, 언젠가 작가의 다른 작품을 본 적이 있나보다.
 
# 김환기 : 달빛
김환기작가의 파란색은 어느 작품을 통해서 봐도 굉장히 마음에 든다. 어쩌면 작품 속 둥근 이미지들도 이 차분한 파란색을 이루는 요소일 수 있겠다. 거기에 두껍게 물감이 올라서 입체감을 이루는 모습도 보기 좋아서 앞에서도, 옆에서도 한참을 보았다.
*특히 작가님 작품 주변에 적혀있는 그의 사색들 속 내용에서 그의 작품 속 메시지가 다시금 느껴졌는데, 즐거운 경험이었다.
 
# 장욱진 : 춘필춘상
 
싱싱한 새벽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나에게는 이른 새벽의 산책이 몸에 붙었다.
고요하고 맑은 대기를 마시며 어둑어둑한 한적한 길을
걷노라면, 새들의 지저귐 속에 우뚝우뚝 서 있는 모든 물체의 부각이 씁쓸한 맛의 색채를 던져준다.
이럴 때처럼 싱싱한 나무들의 생명을 느껴본 일은 없다.
저마다의 구김살 없는 다른 꼴의 얼굴들로 소리 없이 웃으며 생생한 핏줄의 악동으로 속삭여 주는 듯도 하다.
시끄러운 잡음과 먼지를 뒤집어쓰지 않은 싱싱한 새벽의 표정을 나는 영원히 닮고 싶은 것이다.
 


+ 작품 외에도 서로간 교류하는 사사로운 글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서정을 짚어보고, 거꾸로 다시 작품에서 그 느낌을 찾는, 마치 해답지에서 답을 찾은 뒤에 다시 문제를 한번 더 풀어봄으로써 내 방법이 맞았는지 확인 받을 수 있는 과정 같은 느낌을 받았다.
 
+ 이상이 운영했다는 제비 라는 다방에 대한 설명을 접하기도 했는데, 예전 프랑스에 존재했던 살롱같이 당대 지식인들이 의사소통하는 토론의 장이었다는 점에서 지금은 사라져버렸다고 하여 굉장히 아쉬움을 느꼈다. 특히나 전시 후감이나 독후감을 나눌 상대가 항상 필요하다고 느끼는 요즘인데, 제비와 같은 장소가 다시 등장한다면 좋겠다.
 
+ 이번 전시를 위해 국립현대미술관 측에서 이수경이라는 작가에게 본 전시에 대한 작품을 의뢰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공작새의 꼬리털이 수놓아진 발이 제작되어 전시되어 있었는데, 무슨 뜻인 줄 모르고 하마터면 지날 뻔 했던 것을 설명을 보고서 의미를 알고 감탄했다. 
그는 이번 전시품을 보고 당대 작가들의 모습에서 공작새를 떠올렸다고 한다. 
가난 / 모순으로 가득찬 시대이지만 고결하고 찬란한 정신세계를 유지하던, 그다지 필요 없지만 몸집에 비해 큰 존재만으로도 큰 기품을 지니던 예술가들을 말이다.
작품의 외형은 외형일 뿐 그 내면에 진정한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에는 타인의 동의를 구하려는 의도도 포함된다라고 혹자는 정의내렸는데, 이 말에 굉장히 공감한다. 
전시에 관심을 갖는 이유에는 교양있는 사람들의 행위 이미지에 나를 대입하고픈 의도가 아무래도 0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역시 내가 전시작품을 감상하는 이유는 아직 마땅히 규명하지 못한 나만의 미의 정의를 다른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작품에서 힌트를 얻어 명확히 하려는 데 있다.
여러 시도들 중 유난히 한국작가의 작품에서 많은 공감, 동의하는 마음을 느끼고 있는데 아마 언어, 민족성, 삶의 배경 등에서 공통점을 갖는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