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
친구들과 후감을 나누려는 목적으로 읽게 되었다. 철학서나 사상서도 아니고 더군다나 매체에서 유명세를 얻고 있는 작가의 소설이라고 하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소설책은 잘 사지 않기에 여느 소설 보는 것 처럼 이따금 서점에 들러 전에 보던 내용에 이어서 보기로 처음엔 마음먹었다. 하지만 실제로 읽어보니 굉장한 몰입감과 함께 눈에 담기는 표현법, 기법 등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자세하게 보고 싶은 마음에 덜컥 사버렸다.
역사소설이라는 장르로 해제에서 소개되듯 구한말 우리나라가 겪어야 했던 가슴아픈 역사적 흐름에 허구 인물들을 조합해서 현실과 허구가 공존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오래도록 옳다고 소중히 여겨온 것들이 빗발쳐 쏟아지는 서구 문물에 의해 처참히 무너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소설은 보여준다. 각자의 사연대로 희망을 가득 안고 고국을 떠나 본인들이 근간이라고 여겼던 거의 모든 것들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 낯선 땅에 떨어져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왕실 가문 출신인 이종도의 가족들은 애초에 현실적인 부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고상한 관념적인 부분에만 골몰할 수 있을줄 착각하고 타국으로 옮겨온 모양이다. 현실을 뒤늦게 자각한 자식들은 숱한 시련을 겪지만 그래도 이런 저런 모습으로 노력하여 활로를 모색하고 철저한 변화를 통해 안정을 찾는데 반해 이상을 놓지 못한 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이종도와 그의 아내는 결국 방향조차 짚지 못한 채 사라진다.
조장윤과 김이정 등의 하층민 출신의 사람들 역시 많은 시련을 겪으나, 이상적인 희망을 추구하며 고군분투하다 결국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원래부터 품었던 이상적인 뜻을 실현하고자 하던 이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반면, 기존 마음속에 지니던 모든 것을 씻어내버리고 현실에 완전히 적응해버린 자들은 결과적으로 안정을 찾는다. 살아남는다.
실제로 고종의 직계자손이 미국에서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는데 자신의 핏줄을 알지 못하고 살다 최근에서야 자신의 뿌리를 알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
캄캄하고 답답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굉장히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목표에서 위안을 얻는 듯한 나의 모습을 그들의 삶과 비춰보게 되었다. 비록 진우와 연수의 삶이 보통의 가치관에 빗대어 보자면 굉장히 부정적인 요소로 가득한 게 맞지만, 삶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인 존재를 위한 행위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들은 굉장히 현실적으로 잘 변모한 것이다. 나의 담 밑부분 어딘가 중요한 곳에 빠진 돌이 몇군데 있다고 느꼈다.
결과를 위해서 과정이 따르는데, 둘 다 올바르게 성취할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결과만을 우선적으로 취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과정이 올바르게 이뤄졌는지에 대한 고찰 자체도 우선 결과가 성공한 뒤에야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어서 닿은 생각에는, 어차피 애초부터 결과를 이뤄낼 거라는 가정으로 무언가에 임하게 될 텐데, 결과를 이룬 후에는 필연 과정 자체에도 생각이 닿을 터이니, 최대한 과정을 타당하게 가꾸어 후에 부끄러움이 없게 해야겠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도 해보게 되었다.
기법적인 면에서 인상깊었던 건 따옴표를 사용하지 않고 전하는 대화들이었다. 구전동화를 넌지시 읽어주는 듯한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분위기와 상황, 대화까지도 모두 이어서 전해졌다. 문체로 자연스럽게 해둔 모습이 그렇게 자연스러웠다. 구술체가 아니라서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외에 작가 특유의 감성으로 적은 표현법들이 사건들의 상황을 상상할 수 있게끔 했는데, 주요 줄거리를 떠받치는 역할로서 톡톡히 역할한 모습들도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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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문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던 신음소리는 오후가 되자 수천 폭의 천을 동시에 찢어대는 비명이 되었다.
소년이 제 어둠 속의 어둠만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닥을 굴러다니던 썩은 감자 한 톨이 그들의 몸 아래에서 뭉그러졌다.
한 점 일그러짐 없는 밝고 환한 보름달이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불꽃이 날름거리며 삽시간에 편지를 삼켜버렸다.
두 달이 지나도록 꽃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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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친구들은 책 후반부에 등장하는 제법 상세했던 남미 혁명사에 대해서 깊숙히 파고들어 따로 역사를 찾아보면서 배경을 이해해보는 재미도 느꼈다고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주요 줄거리에 집중하지 못하게 산만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예전 다빈치 코드를 읽으면서 느꼈던 작가의 방대한 지식에 대한 감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기도, 따옴표가 들어가지 않은 전지적 작가 시점의 훌륭한 문체를 구경한 경험이기도, 그리고 현재의 나를 많이 되돌아볼 수도 있었던 복합적인 경험을 선사해주는 독서였다.
* 최근에 출판사가 바뀌면서 먼저 버전에는 없던 일부 줄거리가 추가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줄거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분이지만, 이러한 시도도 있을 수 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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