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3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프라그마티즘에 관심이 생겨 그 분야 몇몇 인물의 책을 찾아보던 중 스피노자에 이르게 되었다. 정확히 실용주의로 분류되지는 않은 듯하나 종교에 대한 견해 등에서 비슷한 취지의 사상이 많이 보인다.
이과 인지라 서양철학 연보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여 이름만 언젠가 기사 같은 곳에서 인용된 걸 본 적이 있을 뿐 그의 사상은 전혀 알지 못했다.
세상의 마지막날에는 사과나무를 심겠어요 던가.
그의 주요 저서에는 에리카, 신학정치론 그리고 정치론 등이 언급되는데, 직전의 독서에서 어느 원서를 배경지식 없이 읽었다가 시간을 많이 잃어버린 탓에 이번에는 마중물 격으로 그의 사상을 훑는 해설서를 먼저 좀 보고 접해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어떤 철학이나 사상을 접할 때 원문이 아닌 타인의 소화를 거친 책을 통해 접하면 치우친 채로 정보를 받아들이게 되므로 굉장히 경계를 하고 보게 되는데
이번 책에서는 스피노자의 저서 3권에 녹아있는 그의 생각을 정말 고르게 잘 섞인 채로 받아들일 수 있게 도움 받은 느낌이었다.
스피노자의 사상에 대하여 궁금하다면 참고할 만한 책이다.
자연 만물의 실체가 점차 파악되면서 그간 절대적 진리였던 종교 교리들과 충돌을 일으켜 종교의 위상이 하락하던 시대에 독실한 유대교 집안의 인물이 숱한 사회적 억압과 불이익에 굴하지 않고 이러한 사고를 이뤄내고 세상에 공유하려 한 굉장한 선구자다운 모습이 참 멋져 보인다.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기도 했다고 전하는데 아마 사람들과의 대화 과정에서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도록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그의 말마따나 인간에게는 인간이 가장 유익한 존재 라는걸 그가 이뤄낸 사고의 산물이 증명한다.
인간의 진정한 기쁨, 행복은 어디서 오는지에 대한 발제 / 종교가 인류에게 있어 역할 하는 바 / 종교의 본질을 흐리는 미신적 편견,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안 등등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사회의 부조리한 문제들에 대한 그의 견해를 접할 수 있는데 굉장한 동질감을 느낀다. 그의 의견이 대부분 공감되었다.
오백여 년 전의 사람이 사유한 생각과 공감대를 느낀다고 하니 오래된 유물을 보는 것과는 다른 묘한 느낌을 느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의 글을 보노라면 인생에 대한 인류의 고민은 수 천년간 같은 맥락에서 돌고 도는 듯하다.
기술발전이 수천년의 세월 동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된 것에 반해 삶에 관한 근원적 질문들은 오히려 더 세세하고 가늘게 더 갈라지고 깊어지는 등 질문의 깊이만 더 깊어져 가는 것 같다.
기술문명의 발전이 가져다 준 물질적 번영과 정신적 번영은 어쩌면 상관관계를 맺을 수 없는 다른 차원의 문제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러한 근원적 고민이 범인류적으로 보편화된 것 자체가 발전이라고 칭할 수 있는게 아닐까, 그래서 이 긴 과도기를 지나 어느 시점이 되면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모두에게 해당되고 모두가 공감하는 사상이 탄생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는 범신론이라는 사상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당시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초 자연적 신을 숭상하는 기독교 사상에 반하여 인간 및 모든 자연을 생성시키는 자연 자체가 신이라고 주장했다.
자연 만물은 각자의 목적에 따라 존재하고 그 목적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띄는데 이 최종적 완성 즉 본질의 실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 모두를 신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선술된 모든 자연은 신이라는 문장에서 자연이라는 단어는 nature로 표현되는 자연물 보다는 Nature, 즉 본능을 의미한다고 말하는게 좀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마치 당근을 싫어하는 아이가 당근을 잘 먹게 하기 위해서 당근이라는 이름의 고기반찬을 새로 만드는 듯한 말도 안 되는 시도로 신을 정의하는 건가, 말장난이 아닌가 싶었는데 그 뒤로 이어지는 내용들을 읽고 보니 그의 의중이 이해되었다.
- 세상 만물은 필연, 인과관계에 따라 설명된다.
- 종교는 결과론적인 것이며, 왜 이게 생겼을지에 대한 고찰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 인간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신을 인식하는 것에 있다.
혹자는 무신론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노자의 도가사상, 불교의 선종 사상에서 받았던 인상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범신론 이외의 사상도 많이 소개되어있다.
- 정신과 신체는 상대적 우위관계가 아닌 상호 동등한 위치에 놓인다.
- 인간의 신체는 무수한 개체들의 집합이다. 그리고 공동체가 하나의 개체를 이룬다. 정신 역시 무수한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정신을 이루는 관념들도 무수한 관념의 합성이다. 무의식이란 인간의 실체가 본성이 다른 다양한 개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생겨난 거라고 답하겠다.
(의식에 대한 인식이 윌리엄 제임스의 생각과 일치한다. 의식을 경험으로 얻은 기억들의 집합 정도로만 그도 정의하였다. 한 쪽이 영향을 받은 걸까)
- 자유란 임의적 의지를 갖는게 아니다. 외적 자극이나 충동에 영향을 받고 그거것에 의해 행하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능력으로부터 자신의 행위를 결정짓는 능동적인 것. (코나투스라고 한다.) -> 외란에 흔들리지 않고 자주적으로 본인이 추구하는 바를 행하는 것이 자유. 그리고 이 자유를 지닌 것만이 Nature이고 이것이 즉 신이 된다.
- 인간에게는 교제하며 그들 모두를 하나로 만들기에 가장 알맞은 유대를 결속하는 것, 우정의 강화에 도움되는 행위가 무엇보다 유익하다.
- 자유로운 인간들은 악을 피하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 자체를 위해 선을 행한다.
- 자유로운 인간들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닌 삶에 대한 성찰이다.
그가 남긴 사상에 대한 공감도 인상깊지만, 막대한 부와 보장된 안락함에 연연하지 않고 본인이 지향하는 삶을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본인이 정의한 자유로운 삶으로 꾸미며 산 모습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고 느낀다.
오랜만에 두둑한 지식을 얻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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