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20
미국 워싱턴 주의 Capital City Olympia를 방문한 적이 있다. 워싱턴 주는 미국 여러 주 중에서도 한국전 참전용사가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주 의회 한 편에 크게 한국전 추모공원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연히 발견한지라 반갑기도, 고맙기도 한 마음으로 방문한 공원에서 발견한 초석에는 이렇게 크게 한글로 적혀 있었다.
잊혀진 전쟁
글이 적힌 의미는 약간 다르겠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큰 부끄러움을 느낀 기억이 난다.
명백한 핑계이지만, 이과로 진로를 정하면서 시작된 학업, 취업 등의 과정에서 나는 역사에 대한 야트막하고 전해듣기만 한 지식만을 지니게 되었다. 한국전쟁과 그 이후 사회 발달사에 대해서도 소상한 내용은 알지 못하고 찾으려는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는데, 남의 나라에 와서 조명해보게 된 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최근에서야 부끄러움을 느끼고 헌법도 찾아 읽어보고, 이슈가 되는 법 발제안에 대해서도 법사위 회의록 등을 통해 이것저것을 찾아보는 중이다. 이 부끄러움에 대한 무의식이 아마 공개구술회가 있다는 소식에 반응한 것 같다. 평일 오후였지만 연차를 쓰고서라도 그래서 참가하게 되었다.
구술회에 참여하신 변순용 선생님의 가족은 전쟁 당시 발생한 고아들을 보듬기 위해 고아원을 설립했다. 한참 많을 때는 200여명까지 지냈다고 하니 규모가 굉장히 컸나보다. 당시 정부의 여력이 부족하여 고아나 난민에게 손길을 뻗기 어려웠는데, 이렇게 민간 차원에서 정부를 대신하여 도운 고아원이 전국에 250여곳이 넘게 생겼다고 한다.
당시 추산으로 5만명이 넘는 고아가 발생했는데, 특히 변순용님 가족이 생활하던 당시 수원은 교통의 요지인 탓에 난리통에 길가에 고아도, 난민도 엄청나게 많았다고 한다. 선생님의 어머니 김향배 선생께서는 길가의 아이들을 보고는 같은 민족으로서 눈에 밟혀 도움을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마침 피난가고 비어있던 팔달로의 외삼촌댁을 이용하여 자유동산이라는 고아원을 설립하셨다. 어머니께서 남기신 고아원 발족 취지문의 내용을 공유해주셨는데, 품으신 큰 뜻을 듣고 정말 존경스러운 마음을 느꼈다.
변순용 선생님 본인 역시도 고아원의 일원으로 동무들과 함께 그 세월을 겪으며 자라오셨다. 동무들을 생각해서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하고, 심지어 집안 사정으로 호적조차도 고아로 적혀있어서 동무들도, 학교의 선생님도 모두 고아인 줄만 알았다가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가끔 외할머니가 멀리서 오셔서 몰래 데리고 나가 따로 무언가를 사먹이던게 거의 전부였지만, 선생님께서는 이런 데 대해서 절대 원망을 하거나 서운함을 느끼는 것은 없었다고 한다. 나누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셨다고 했다.
유엔의 보급물자를 타기 위해 위문 공연을 다니고, 그리고 이를 위해서 고아원에 같이 계시던 음악, 무용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고아원 자체적으로도 많은 교육을 받았다고 하셨다. 연극 등을 하려면 음악, 무용 등 외에도 글을 읽어야 했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자급을 위해 토끼를 길러 판 이야기, 농사지은 이야기, 보급 물자가 오던 날 줄서서 곳간을 채우던 경험 등등 다른 곳에서는 들을 수 없는 당대의 삶을 깊숙히 들어볼 수 있었다.
사회자께서는 당대 학업 진학에 관하여 통계적으로 고아의 1/3은 진학조차 하지 못했다고 기록을 통해 확인했다고 했는데,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호적에 고아라고 되어있으면 국가에서 납부금 등을 받지 않게 되어 있어서 본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고등학교까지는 갈 수 있었다고, 그리고 실제로 자유동산 고아들은 거의 모두 고등학교까지 진학을 했다고 말씀해주셨다. 기록물로만 남는 내용과 실상이 또 이렇게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방청객도 사회자께서도 공감했다.
선생님의 부친께서는 일찌감치 독립운동에 투신하셨는데, 그 중 사회주의 사상에 몰두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전이 발발할 즈음 월북을 하셨고 그 전에는 외가댁과 이념에 대한 마찰로 이혼을 하셨다. 이로 인해 호적에 고아로 등록되어 나중에 고치는데 한참이 걸렸다고 한다. 실제로 이혼을 어린 시절 하셔서 아버님에 대한 직접적 기억은 전혀 없었고, 아버님의 월북 사실 탓에 연좌제로 종전 이후 마땅한 취업도 하지 못하시고 고초를 많이 겪으셨다. 그래서 아버님에 대한 기억은 부정적이기만 했는데, 호적을 고치는 와중에 아버님의 자취를 하나 둘 쫓다보니 수원 향토 박물관이나 관보 등에서 아버님 존함이 거론되는 것을 알게 되어 그때부터 아버님의 독립운동활동, 신간회 활동 등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셨다. 이번 구술회에 참여하신 것도 아버님 어머님의 족적이 널리 알려지게끔 노력하시는 일환이었는데 이 부분 역시도 인상깊었다.
고아 생활부터 연좌제의 고통, 그리고 과거사를 알리기 위한 노력 등 우리 시대의 발달사 모든 과정을 모두 몸소 겪으신 분의 말씀을 듣노라니 그간의 노고에 한없이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나의 모습을 계속 뒤돌아보게 되었다.
올해는 한국전이 발발한 지 70년째가 되는 해이다.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찢겨나가 맨 바탕에서 다시 시작하였음에도 뼈를 깎는 고통과 서로간의 간극, 화합, 그리고 그 과정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뿌려야 했던 피를 기반으로 구성원 모두의 노력을 통해 오늘날의 번영한 국가를 이루었다. 당연하게 생각하고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하여 다시 돌아볼 필요를, 의무를 절실히 느낀다.
개인의 발전을 국가 전체의 발전과 방향을 동일시하여 위국헌신하려는 분의 모습을 마주칠 때마다 굉장한 존경심을 느낀다. 이번에는 큰 뜻을 품고 개인의 인생 전체를 나라의 발전에 바친 가족의 구성원이 해주시는 말씀을 소중해 듣고 왔다.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사함을 가득 마음에 채울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내가 지금 누리는 풍족한 삶을 통해 우리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하루종일 고뇌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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