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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관람기

새 보물 납시었네 @ 국립중앙박물관

20/07/22

2017 - 2019년 들어 추가로 등록된 국보, 보물을 전시중이다. 공개하는 문화재 중 조선왕조실록, 삼국사기 등이 있다고 소개되어 있길래 실물을 볼 수 있는 드문 기회 같아 관심이 생겨 첫날 관람했다.

실록은 조선왕조 중간의 전란에도 사본이 여럿 있었던 덕분에 내용이 현전한다고 한다. 한 왕조의 역사가 세세하게 모두 담겨있는 가치를 인정받아 97년 유네스코에 등록되었다.
실물을 본 소감으로는 우선 책 자체가 생각보다 굉장히 길고 컸다. 거의 400mm x 700mm 정도는 되어보였다. 또한 대부분은 활자 인쇄본이었으나, 광해군일기와 같이 일부 필사본도 있다.

주체에 따라서 관점을 달리하여 같은 시점을 다시 기록한 내용도 소개되어있다. 최석정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노론과 소론 양 정당이 집권한 시기에 작성된 각기 기록에 정반대의 인물 평가가 적혀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사고는 전북 적상산 사고의 건물이 유일하다고 한다. 나머지 사고는 소실되었으나 옛 모습이 다행이 사진으로 남아있어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마루의 회반죽이 지금 궁궐에서 볼 수 있는 반듯한 모양이 아니라 울퉁불퉁했는데 그 모습조차도 고풍스러워서 직접 보고 싶은데 아쉽다.
적상산에 보관되던 조선왕조실록은 일제시대 규장각을 거쳐 한국전쟁중에 북한으로 넘어갔다고 알려졌는데 최근에 국내에서 이 적상산사고분 4책이 발견되어 이번에 국보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실록의 열람에 대하여 본인 기록은 물론이고 선대왕에 대한 기록을 절대 전혀 볼 수 없게 해두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후기에 이르러서 선대왕의 업적을 후대 왕에게 열람할 수 있도록 봉모당본이라는 인출본을 만들기도 했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지금이야 기록유산으로서 우리나라 과거의 역사를 상세히 알려주는 귀한 자료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기록보다는 왕실의 권위를 위한 목적으로서의 성격이 짙었을 것이다.
후기에라도 이르러 선대의 경험을 참고할 수 있게 데이터베이스로 사용되었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만약 이런 봉모당본 성격의 인출본이 임진란 등 주요 난이 일어나기 전에 발간되어 중간에 붕당 등으로 인해 느슨해진 기강을 다잡는데 도움이 되었더라면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최석정의 초상화와 보관함도 바로 옆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당시의 관례가 용모에 흠이 있더라도 모든걸 세세하게 전부 기록하는 것이라서 눈 한쪽에 모기물린 것 같이 부은 흔적까지 세세하게 그려진 모습에 인상깊었다.
얼굴 생김새와 눈매, 의복 차림새에서 굉장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관복도, 초상화의 구도도 이것를 의도했을 것이다.

초상화를 구성하는 인물 외의 구도나, 목제 발받침, 검정 의자에 걸린 표범가죽, 두루마리에 붙인 종이의 비율 등이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이 초상화 옆으로 비슷한 구성이지만 직급이 더 낮은지 옷의 그림 일부가 차이나보이는 다른 사람의 초상화도 있었다. 사후에 전신상을 참고해서 흉상 초상화를 추가 제작하기도 했다고 한다. 역시 구도, 기법은 동일했다.

경현당석연도라는 임금이 참여한 경연을 그린 작품도 눈길이 갔다. 구도가 메르케디안 작도법처럼 가장자리의 건물 기와 등이 마치 경연을 어안렌즈로 보는것처럼 왜곡되어있었는데 현대의 인포그래픽 애니메이션에서 볼 법한 기법이 당대 유물에서도 보이는게 인상적이었다. 서양의 기법이 막 들어올 시기라서 영향받은 것이라고 한다.

왕이 내린 교서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태조가 내린 개국공신에 대한 교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혔다고 한다.

'그대의 공적은 종묘에 기록될 것이니 황하가 띠처럼 얇아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작아지더라도 영원히 잊지 못하리'

영원성의 상징에 중국 지명이 들어간 것도 주목할 만 했고, 교지 끝에 조선 초기답게 고려의 국새가 찍힌 것도 신기했지만, 개국왕에게 이러한 문장을 받은 자 본인은 물론이고 이걸 내려받은 가문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이 누린 혜택을 떠나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하늘을 찌를까를 상상해보니 괜히 내가 찌릿했다.

'평양성도 병풍'도 인상 깊었다. 조선시대 평양은 굉장히 인기있는 풍류도시였다고 한다. 평안 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이 병풍을 보고 이해가 되었다.
그림속에 묘사된 평양 속 건물이며, 배치며 표현된 모습까지 굉장히 매혹적이었다. 그 중 일부는 아직까지 건물이 전해진다고 하며 병풍 속 건물과 현재 사진을 비교해두기도 해서 비교해볼 수 있었다.
기와 치미가 우리가 남한에서 보는 모습과 대부분 다르고, 지붕의 굴곡도 끝부분 각도가 얕고 길쭉한 모습이 실제로 보고 싶은 모습들이 많았다. 치미를 사용하는 지붕 만듦새는 고려 이후로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고려, 고구려와 인접한 고을이기에 예전 모습이 많이 남아있는게 아닐까.

시서화는 특징이 큰 글씨에 본 뜻을 바로 적지 않고 은유를 해둔 탓에 난해하고 속뜻을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최고 가는 반찬이란 두부나 오이생강과 나물'

이라는 의미로 직역되는 글씨를 보고 한참을 웃었는데 (김밥천국 메뉴판을 허세 가득하게 적어둔 건줄 오해했다.) 그 옆 작은 글씨에 적힌 설명에 참뜻이 적혀있는걸 보고서 비웃었던 내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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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촌 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이고, 최상의 즐거움이다. 비록 허리춤에 말만큼 큰 황금 인장을 차고, 식사 때 앞에 차려진 음식이 사방 한 길이나 되며, 시중 드는 첩이 수백 명이라도, 이런 맛을 향유할 수 있는 이가 몇 사람일까?
행농을 위해 쓰다. 일흔 한 살 과천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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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작품 중에서는 사리함, 불교법문, 인쇄활판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공들인 만듦새가 주목할 만하다.

이번에 함께 등록된 건축 문화재와 중량이 무거운 문화재 등은 전시가 어려운 관계로 항공촬영기법으로 찍어 소개되었다. 적멸보궁, 천은사 극락보전, 왕실 태실 등 직접 보고픈 유적이 덕분에 많이 늘어났다. 조만간 방문해보아야겠다.

+ 우리가 알고 있는 고조선의 명칭 앞부분에 옛 이라는 글자가 붙은 것은 이씨왕조 조선과 구분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역사서에는 고조선이 모두 조선으로 기록되어있다고 들었는데, 삼국사기에는 고조선으로 적혀있었다.

전시 말미에 본인이 생각하는 미래의 국보와 보물에 대한 질문이 있었는데, 어린이들이 하나같이 자기 이름, 가족, 밥, BTS 정도를 적어둔 걸 재밌게 보다가 중간중간 받아들일 만한 생각들이 적혀 있어 공감하기도 했다.

우리가 국보라고 부르는 유물들이 귀한 대접을 받는데는 마냥 오래된 연대보다는 당대의 특수성을 지닌 데에 이유가 있다.
문화재 지정 원칙에도 흔치 않은 것이어야 하고 동시에 당대의 특성을 잘 지녀야 하는 아이러니한 속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되어있다.
실제로 나는 박물관 등에서 보는 보물급 이상의 문화재에서 당대의 일상을 느끼지 못한다. 대신 당대를 느끼게 해주는 뉘앙스만 취한다.
대부분의 화려한 문화재는 풍속이라는 무형의 관념을 담는 용도를 위해 형상화된 희소한 외형을 지닌 물건일 뿐 그 화려한 접시와 번쩍거리는 장신구가 당대 생활을 대표하는 것들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늘 쓰던 것보다 뭔가 상징으로 세우기 위해 귀한 공을 들여 만든 작품들은 실용적이지 않고 뜻을 담기 위해 과장되어있다. 이 특징이 희소성을 부각시키고 이러한 작품들을 귀하게 여기도록 느끼게 만들고 문화재가 될 가능성을 높이지만, 과거와 지금의 큰 차이점은 디지털 기록 기술의 발달 덕분에 무형의 관념을 형태가 있지만 사실상 무형이나 다름없는 저장소에 기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시대의 관념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담겨 후세에 전할 것인가. 그리고 그에 앞서서 무엇이 담길 것인가.
결국 그 자리에서 떠올리진 못하고 우선 설문 종이만을 집어들고 나왔다. 생각해볼 만한 주제이다.

귀한 유물 덕분에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