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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National Museum of the US Air Force (Dayton, Ohio)

 

 
250112
 
# 무덤
 
꼬마시절 집 뒤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그 산을 무척 자주 올랐다.
꼬불꼬불한 길을 오르다 보면 콘크리트로 만든 팔각정이 있었고 정상을 넘어서는 평온한 바다가 보이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나는 그곳이 공동묘지인지 몰랐던 것 같다.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잔잔한 바다와 갈대밭을 배경으로 실컷 공을 찰 수 있는 그곳이 편했다.
지금은 공연장이 크게 들어서는 바람에 옛 모습을 잃은 까닭에  있어도 없는 곳이 되었다.
그리운 그 곳을 눈을 감고 생각하면 아늑하고 평온하다.
사진을 찍어두길 참 잘 했다.


묘지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이 추억 덕분인 듯하다.
나는 여행을 가면 과거의 흔적을 즐겨 찾는다. 좋아하는 작곡가의 안식처나 존경하는 분께서 쉬고 계신 곳을 주로 찾았다.
실제로 본 적이 없는 그들의 실체가 놓인 곳. 심지어 우리는 그 유해를 볼 수도 없다.
누군가가 묻었다고만 하고 빈 관을 넣었더래도 우리는 그곳이 그의 무덤이라고 믿는다.
 
공동묘지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생각해보면 거꾸로다.
누군가를 부르거나 생각할 때만 존재하는 이름은 억지로 비석에 정으로 쳐서 붙잡아 두었는데 정작 그 사람의 실체는 땅 속에 가려져 있다.
이렇듯 삶의 끝에 다다르면 유형과 무형이 서로 뒤바뀐다.
신체는 사라지는 반면 그것이 이루었던 수많은 행적과 그가 남긴 후손, 작품, 사상 등은 영원히 이름에 종속되며 그 이름은 묘비에 고정된다.
그 마저도 일반인의 이름은 일부 그의 지인 혹은 후손만이 옅은 기억을 떠올릴 뿐 대부분은 알 방법이 없이 그냥 지나친다.
이러고 보면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해서 비석에 적힌 이름에 타인의 시선을 유치하려는 노력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삶을 마무리 하면 땅 속으로 들어간다. 생전에 지니던 것은 누굴 주든 죽기 전에 다 쓰든 놓게 되어 있다.
그나마 생애 동안 내가 완성한 것들은 내 사후로도 남는다. 자식이 그렇고 문학 등의 예술이 그렇다.
완성하지 못한 것은 대부분 그대로 사라진다. 죽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하던 것을 마무리해야 하는 까닭이다. 아깝지 않은가.
 
'도서관이야 말로 세상의 수많은 사람이 살아있기도 죽어있기도 한 공동묘지'라고 누군가가 언급한 것을 언젠가 본 적이 있다. 
그 뒤로는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도 공동묘지와 비슷하게 느낀다.
이번에 다녀온 박물관에 대한 기록을 남기려고 하던 중 그 말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니 다른 점도 있다.
사람의 묘지는 형태가 사라짐으로써 존재 이후의 시간을 달리는 데 반해

퇴역한 기계류를 모아둔 곳은 무형과 유형이 서로 교대하지도 않고 전시물은 현역일 때와 다른 목적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라이트 형제와 오하이오주
 
오하이오 주는 우주 항공 분야와 연이 깊다. 우주비행사 존 글렌은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 출신이다.
그를 기리기 위해 콜럼버스 공항은 그의 이름을 사용했다.

닐 암스트롱도 오하이오 출신이고 신시내티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에는 라이트 형제가 생애 대부분을 보낸 데이튼이라는 도시가 있다.
 
미국은 주 별로 번호판이 다르다. 번호판에는 각 주의 모양과 함께 슬로건이 함께 적혀있다.
뉴욕은 'Empire State' / 뉴저지는 'Garden State' / 텍사스는 'Lone Star State' 이런 식이다.
 
그 중 오하이오와 노스 캐롤라이나는 슬로건이 다소 겹친다. 
'Birthplace of Aviation'(오하이오) / 'First in Flight'(노스 캐롤라이나)


박물관 맨 초입에는 라이트 형제에 대한 소개가 상세하게 나와있다. 이곳에서 이 내력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

당시 비행기를 개발하려는 노력은 독일 등 세계 곳곳에서 이미 많이 있었다.

다만 실패하거나, 성공했어도 응용으로 이어지지 않거나 무동력 글라이드를 이용한 실험에 그쳤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 윌리스 캐리에의 에어컨, 그리고 어쩌면 스티브 잡스의 스마트폰도 마찬가지.

우리는 발명가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 주변에는 비슷한 시도가 많았고 서로간 영향도 많이 받았다.)

라이트 형제의 시도에 의의가 있는 이유는

첫째, 동력이 있었고 (powered)

둘째, 양력을 공기보다 가벼운 물질의 부력에서 얻지 않고 유체역학적 요소를 이용한 것이었고 (heavier-than-air)

셋째, 러더 등을 통해 제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controllable)

또한 발명 시도가 수요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던 덕에 바로 상업용으로 응용이 이어진 것도 큰 역할을 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 실험을 시작한 곳은 그들의 집이 있었던 오하이오 데이튼이었다.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던 그들은 선구자였던 독일의 릴리엔탈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뒤 자신들도 비행기를 만들어 보기로 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일정하고 충분한 바람이 부는 곳이 필요했다.
기상청에 문의해서 적합한 장소를 문의했고 이 때 추천받았던 곳이 노스 캐롤라이나 키티호크의 Kill Devil Hills라는 모래언덕이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먼저 무동력 글라이더로 실험을 진행했다.

비행 중에 무게중심이 흔들리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고정된 조종간과 각 러더를 와이어로 연결하여 조종할 수 있도록 했고

릴리엔탈이 만들어 둔 공기역학 자료를 참고하여 양력이 발생하도록 날개 단면을 갖추었다. 이렇게 389피트를 날았다. (1901)

이후 양력 데이터를 직접 개선하고 초경량으로 제작된 가솔린 엔진, 높은 효율성을 갖도록 고안한 프로펠러까지 갖추었다.

한 번의 실패를 겪고는 마침내 동력 비행에 성공했다. (Dec. 17, 1903)

이듬해에는 데이튼으로 돌아와 수행한 실험에서 세계 최초의 full-circle 비행(이륙 > 선회비행 > 착륙)을 달성한다.(September, 1904)

이렇게 실험의 여정에 North Carolina와 Ohio 모두가 배경에 속하게 되어 각각의 번호판에는 비행에 관한 슬로건이 담기게 되었다.

 

그 뒤로 특허를 냈고 미국 정부와 납품 계약을 맺으려다 실패로 돌아간다.

아무도 비행기를 만들었다는 걸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907년 루즈벨트 대룡령이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미 육군을 통해 접촉하게 했고 1908년 마침내 육군 납품 계약이 성사된다.

1909년 8월 2일 첫번째 비행기가 납품된다. 납품 계약액은 $30,000.

이후 2년동안 이 기체는 미 육군의 유일한 항공기였다.

30.6마력 4피스톤 가솔린 엔진을 달았고 최대 속력은 4.2mph, 운용 시간은 최대 1시간이었다고 한다.

 

 

 

엔진 축에 더블 스프라켓을 걸고 각 날개로 체인을 연결해서 프로펠러 2개를 돌렸는데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체인 하나는 중간을 꼬았다고 한다. 이 덕에 비행이 한층 안정적이 되었다고 한다. (돌림 모먼트의소거)

 

 

 

이 기체는 1911년 퇴역하고 현재는 워싱턴 D.C.에 전시되어 있다.

여기에 전시되어 있는 기체는 1955년도에 이 박물관 스태프 중 한 사람이 만든 복제품이지만

부속 중 일부는 라이트 형제 재단에서 기증한 실제 부품도 있다고 한다.

프레임은 나무로 되어있고 캔버스 재질의 날개인 것이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풀리, 체인 등 기계부속이 분명 수제작품일텐데 녹도 없고 정교해서 인상깊었다.

 

 

 

에어포일 형상 시험을 위해 그들은 풍동 터널도 갖추었다. 160mph까지 속도를 구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역사 속 먼 인물이겠지만 이 동네 꼬마들에게는 옆집 살던 아저씨의 이야기로 친숙하게 들릴 수 있을 듯하다.

 

 


# 미 공군 박물관
 
처음 이곳을 찾아간 때는 초여름이었다. 
박물관은 고속도로 출구와 가깝다. 미국 답게 넓은 부지 가운데 박물관이 우뚝 솟아있어서 멀리서도 잘 보였다.
입구에 있는 건물은 외벽이  마그네슘인지 알루미늄인지 반짝이는 재질로 되어 있다.

 
예전에 워싱턴 D.C.에서 우드바 헤이지 센터라는 항공우주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우주왕복선 엔터프라이즈호와 SR-71 등 다양한 비행기가 전시되어 있는 엄청나게  박물관이었다.

검색해보니 지금은 디스커버리호가 전시되어있고 엔터프라이즈호는 뉴욕의 인터피드 함상 박물관으로 옮겼다고 한다. 
아무튼 그 곳도 엄청 크다고 생각했는데 여기는 그 큰 격납고 4개를 다 쓰고 있다. 다 둘러보고 나서 엄청난 피로감을 느꼈다.

 

 


입구에는 추모 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들어가기 전 한인마트에서 산 앙금빵과 물을 여유롭게 먹고 들어갔다. 날씨가 정말로 좋았다. 

푸른 하늘과 공원이 잘 어울렸다. 

 

 

공원에는 missing man formation을 하고 있는 편대비행 동상이 있다. 고인을 추모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방문 당시에는 그냥 지나쳤다가 나중에 의미를 알게 되었다.

 

 


여러 비행 편대의 추모비가 남아있다. 이따금 일부 비석에 유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와서 추모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대부분 2차 대전, 1차 대전, 베트남전, 한국전쟁 등 오래 전의 기억에 관한 추모비인데 여기저기에서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

그들의 역사는 아직 살아있음을 느낀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 박물관은 묘지와 차이가 큼을 느낀다.

 

사람마다 가슴에 품는 자유는 다양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나는 여기 계신 분들이 품었던 자유가 참 와 닿는다.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쥐어주는 것을 자신의 자유로 꼽은 사람들이 명예롭게 쉬고 있다.

거꾸로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본다. 사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난 빚이 있기 때문이다.

본능에 못이겨 나의 자유를 빛바래게 하는 경우가 요새 잦다.

반성과 함께 의지를 다지는 기회가 되었다.

 

 

 

박물관으로 들어서기 본관 입구를 보니 옆면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우리에게도 큰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잠들어 있게에 이름을 읽어보았다.

 

 

 

양식이 있는 듯 없는듯 하다. 한 사람당 세줄씩 글을 남겨두었는데 어떤 이는 이름 - 생일, 기일, 추모글 이렇게 적기도 했고

추모글 대신 소속 및 참가 전쟁을 적은 이도 있었다. 이름만 적힌 이도 있다. 규칙이 있지만 다양한 모습에서 미국스러움이 느껴졌다.
한국전 참전한 이력이 눈에 많이 띄어서 그 위주로 훑던 중 가운데 즈음 일본인의 이름을 발견했다.

2차대전과 한국전에 참전한 인물이라고 했다. 호기심에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더니 LA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이라고 한다.

검은꽃이 생각났다.
https://www.legacy.com/us/obituaries/sfgate/name/mitsuo-murakami-obituary?id=17203344

 

주차장에서 가장 가까운 격납고 1번부터 4번까지 순차적으로 이동하게 되어있다. 비행기의 역사 순서대로 전시되어 있다.

 

라이트 형제에 대한 설명이 되게 상세해서 한참을 보다가 넘어갔다.

라이트 형제 이후의 공간에서는 비행기 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좀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비행기 정비공들은 크게 rigger 와 fitter로 구분되었다고 한다.

fitter는 프로펠러, 엔진 등 기계 계통을 담당하고 rigger는 구조체의 목재, 배선, 날개를 덮는 천 등을 담당했다.

비행시 이런 구조체들은 손상을 많이 받으므로 특히 계속해서 손을 봐줘야 했다.

배선은 러더 등을 힘줘서 조종하다보면 느슨해지기 일쑤이므로 계속해서 장력을 유지해주어야 한다.

천은 오일 등에 묻어있으면 썩으므로 계속해서 청결하게 유지해줘야 했다.

그리고 dope이라고 불리는 섬유질 액체를 붓으로 계속 발라줘야 바람이 통하지 않고 날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dope을 먹인 천은 제곱미터당 약 5키로그램의 무게가 나갔다고 한다.

 

라이트 형제의 초기 비행기 이후로 수많은 1차대전 즈음까지의 비행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실 2차 대전 이후대의 비행기에 주로 관심이 있어서 여기는 주로 엔진 스펙 등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주로 보았다.

초기에 50마력대에 머무르던 엔진은 1차대전 즈음에는 130마력대이다가 300마력 대의 고마력을 거쳐

2차대전 즈음에는 1500마력대의 엔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진주만에서 봤던 두리틀 대령의 도쿄 공습에 사용되었던 B-25 도 전시되어 있다. 

1700마력대의 라이트사 엔진 2기를 사용했다. 이 회사는 Curtiss라는 회사와 합병했고 지금도 존속중이다.

도쿄 공습에 참여했던 80인을 기념해서 위스키와 잔 세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언젠가 두 명만 남았을 때 남은 두 사람이 나머지를 추모하며 저 위스키를 따 건배를 하기로 했는데 실제로 행해졌는지는 안 적혀있었다.

맨 마지막 대원이 2019년 작고하면서 이제는 역사로 남게 되었다.

 

 

 

꼬마때 골드윙이라는 비행기 게임에 푹 빠져있었던 적이 있다. 그 때 사용했던 비행기인데 스핏파이어라는 영국제 비행기이다.

날개 형상이 엄청 예뻤던 기억이 난다.

 

 

 

드라마 밴드오브브라더스에서 보았던 수송기도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fps 게임에는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비행기이다. 

정식 이름은 CG-4A Hadrian. 글라이더임에도 조종사가 2명이라고 한다. 7500lbs까지 실을 수 있다고 한다.

12,000기가 넘게 생산되었는데 그 중 1,074기는 오하이오에서 생산되었다고 한다.

 

 

 

머스탱도 만났다. 설명에서 적길 Packard라는 영국 회사의 멀린 엔진을 사용한다고 한다.

이 엔진은 아까 보았던 스핏파이어도 사용한다. 

12기통에 2단 수퍼차저가 달렸고 무게 1,690 파운드에 최대 rpm 3,000 / 최대 마력 1,695 / 가격은 당시 25,000 달러였다고 한다.

 

최근에 에어쇼에서 이 엔진소리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두 대가 동시에 비행하면서 화음을 들려주었는데 정말 멋있는 소리가 났다.

 

 

 

B-29 폭격기는 어딜가나 있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기체는 제일 유명한 기체중 하나이다. 바로 나가사키에 핵공격을 했던 바로 그 비행기다.

다른 B-29와는 달리 핵공격을 위한 B-29는 폭탄 적재량을 늘리기 위해 기총을 제거하는 등 좀 더 개량을 해야 했다고 한다.

 

미군은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기대하고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한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일본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시 일반적인 폭격을 재개하다가 1945년 8월 9일 미군은 또다른 폭격을 준비한다.

당시에 가용한 핵폭탄은 fat man과 little boy 2기뿐이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애놀라 게이 대신 'Bockscar' 라는 별명을 가진 B-29기가 출격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1800피트 상공에서 fat man은 폭발한다. 

히로시마는 사방이 평지였기에 파괴력이 엄청났으나 비슷한 사양의 fat man이 떨어졌떤 나가시키는 산지 지형이었던 덕에 피해가

비교적 덜했다고 한다.

당시 Bockscar에 탑승했던 승무원의 표현에 따르면 폭발하는 순간 마치 비행기가 전신주를 들이박은 것 같은 충격이 전해졌다고 한다.

 

fat man은 관측하기 쉽도록 노란색으로 칠해졌다. 그리고 겉면의 크랙, 이음매 등으로 인한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검정색 실링을 했다.

전시된 폭탄은 실제 무장했던 폭탄이고 지금은 전시를 위해 무장해제된 상태라고 한다.

 

 

 

한 켠에는 일본의 제로센 전투기도 있었다.

제로센이 처음에 등장했을 때에는 압도적인 기동력으로 인해 미군에게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무게가 한참 가벼웠던 덕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면에는 일본의 기술적 한계가 있었다. 엔진을 특정 출력 이상으로 만들 시간적, 기술적 여력이 없었던 일본은

조종석과 연료 탱크 등에 철판 등을 생략하는 등의 무리수를 둬야 했다. 덕분에 기동성이 좋았다.

초기에 미군은 도그 파이트에서 맥을 못 추렸다. 하지만 차츰 전술을 바꾸었고 hit-and-run 방식을 통해 1:1 공중전을 피했다.

덕분에 교전비가 뒤바뀌게 되었다.

 

일본은 나중에서야 엔진 출력을 개선하고 무장도 보탰지만 엔진 출력이 16% 개선되는 동안 무게는 28%나 늘어나면서 특유의 기동성도

잃었고 결국은 미군으로부터 우세를 모두 잃었다고 한다.

 

전시된 기체는 파푸아 뉴기니에서 노획되었다고 한다.

 

 

 

호기심과 욕심에 모든 안내를 다 읽으면서 봤더니 1/4밖에 안 보았는데도 체력적으로 상당히 힘들었다.

그 와중에 방송을 통해 가이드 투어가 곧 2격납고에서 시작한다는 안내를 들었다.

 

사실 두 번째 방문이라서 다시 둘러보지 않고 내가 보기로 한 비행기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기대가 되어

가이드 투어 하는 곳으로 향했다.

 

공군에서 30여년 복무하고 퇴역한 군인께서 가이드를 해주시기로 하고 기다리고 계셨다.

미국은 포멀한 장소에서는 항상 자켓과 구두를 신는다. 60대 후반으로 보이지만 아주 건장한 분께서는 설명도 잘 해주셨고

자상하셨다.

 

가이드께서는 미 공군에서 F-15 편대장까지 하셨다고 한다. 따님께서도 미공군에 근무하고 계신다고 한다.

지금은 은퇴하시고 공군박물관 바로 앞 마을에서 지내고 계시다고 했다.

 

오래 군복무를 하신 만큼 전시품을 직접 몰았던 인물들과도 친분이 두터워서 비화들도 정말 많이 알려주셨다.

안내판에는 나오지 않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따로 한 번 돌고 가이드를 다시 들은게 절묘했다.

 

2번 격납고는 가끔 행사하는데 사용한다고 한다. 식당도 있어서 따뜻한 음식을 계속 내올 수 있다고 하셨는데 

따뜻한 음식이라고 말하는 모습이 군인다웠다.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10여명 붙었다. 그 중에는 공군에서 일했던 부부도 계셨다. 그 덕분에 더 많은 것들을 들을 수 있었다.

 

 

 

가이드와 그 부부가 나눈 이야기 중 하나는 전시된 F-22 랩터의 테일넘버에 관한 것이었는데 AF 다음의 숫자가 잘못 적혀있다는 것이었다.

헤아리기로는 우리나라도 기종별로 기지가 정해져 있듯이 랩터도 특정 부대에서만 운용을 하는데 저 003은 랩터를 운용하는 부대가

아닌 듯했다.

 

가이드께서는 고증 오류로 일부 비행기가 잘못 적힌 사례가 있다고 하면서 랩터의 경우는 처음 알았다고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기체는 실전 배치된 게 아니라 실험용으로만 쓰였기 때문에 시험을 진행한 기지의 번호를 적은게 아닌가 한다고 알려주셨다.

 

 

 

잠시 따님 이야기를 하면서 무인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따님께서 MQ-9 리퍼를 운용하신 적이 있다고 한다.

리퍼는 운용할 때 이륙하고 나서는 대부분 미 본토에 있는 기지에서 원격 조종을 사람이 직접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착륙 만큼은 미리 현지에 파견된 인원이 캡슐에서 직접 조종한다고 하는데

이는 인공위성 통신이 2초 정도 딜레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 글로벌호크는 완전 무인이라서 프로그램에 설정만 해두면 이륙 -> 작전수행 -> 착륙 모든 과정을 무인으로 수행한다고 한다.

 

 

 

간단한 본인 설명 이후에 우리는 한국전 관으로 이동했다.

 

 

 

한국전쟁은 항공 역사에서 의미가 있는 이정표가 하나 있다.

바로 세계 최초의 제트기 간 교전이 한국 전쟁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2차 대전에도 영국, 미국, 독일 양 진영에 제트기가 있었다. 하지만 실제 교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국의 경우 제트기 손실을 우려해서 본토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고 미군도 2차대전 거의 말기에 이태리 일부에서만 운용했기 때문이다.

 

한국전 당시 북한은 미그기를 1950년 11월에 도입, 그리고 f-80은 그로부터 한달 뒤 즈음 한국에 전개되었다.

미군이 운용한 F-80 shooting star는 제트기이긴 했지만 날개가 직선형이었다. 반면 mig 15는 후퇴익을 가지고 있었다.

직선익과 후퇴익은 기동성 측면에서 차이가 크다. 후퇴익이 훨신 유리하다.

한국전 당시 두 기종이 최초로 맞붙었고 mig-15가 격추당했는데 이는 운이 아주 크게 따라준 것으로 봐야 한다고 한다.

곧 F-86이라는 후퇴익을 지닌 신형 전투기가 보급되었고 이 두 기종은 한국전에서 활약한다.

 

월등한 미그기의 기동성을 분석하기 위해 미군은 노획 포상금으로 $100,000 을 내걸었다.

하지만 당시 소련은 격추를 피하기 위해 UN군 점령 지역으로는 절대 미그기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53년 9월 21일 미그 15기 한대가 김포기지에 착륙한다. 조종사는 21세의 노금석 대위.

그의 어머니는 이미 1951년 북한을 탈출했고 노대위가 귀순한 직후 둘은 상봉했다고 한다. 그는 포상금을 모르고 있었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귀화해서 교수를 지냈고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서 교편에 선다고 한다.

 

 

미그 15는 6000파운드짜리 vk-1 엔진을 사용했는데 사실 이는 소련제가 아닌 영국 롤스로이스의 Nene 엔진을 개량한 것이라고 한다.

 

 

미군은 이 미그를 오키나와로 가져왔고 연구를 시작했다. Chuck Yeager라는 조종사가 시험비행을 맡았다.

나중에 그의 상관인 Albert Boyd가 와서 그에게 미그기가 미군기에 비해 성능이 어떤지를 물었다.

당시 F-86 vs Mig-15의 교전비는 1:8로 이미 미군이 압도하고 있었다.

Boyd는 당연히 F-86가 훨씬 우수하다는 답변을 기대했지만 Chuck은 미그기를 치켜세웠다.

그래서 둘은 번갈아가면서 비행기를 돌려 타면서 시험을 했고 마침내 Boyd도 미그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Chuck이 남긴 말이 바로 ‘it’s not the plane, it’s the pilot’ 이었다고 한다. 이 대사는 나중에 영화 탑건에서 사용된다.

 

 

장비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우세했던 것은 풍부한 경험과 우수한 전술 덕분이었다고 한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 직후였기 때문에 미군에는 베테랑이 굉장히 많았다.

그 연유로 우세를 가졌던 거지 비행기의 기술적 우위를 이유라고 말할 순 없다.

실제로 한국전때 미군 조종사 ace지도를 보면 40명이 넘는데 ace 만 40명인 건 엄청난 것이라고 한다.

 

실컷 비행기를 뜯고 분석한 뒤 미군은 소련에게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영영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전쟁 이후 한참까지도 소련은 북한을 지원한 사실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1957년 이 비행기는 박물관으로 오게 되었다.

 

 

 

 

우리가 지금은 알고 있는 c-17은 Globemaster 3이다. 박물관 바깥에 있는 c-17이 트랜스포머에 나온 바로 그 수송기라고 한다.

실내에 전시된 이 기종은 그 전 세대인 globemaster 2이다. 내부는 3층으로 되어있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수송기였다고 한다.

어렸을 적 사천 공군비행장 근처의 박물관을 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도 이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러한 프롭기 수송기는 운용중에 엔진에 접근할 수 있도록 날개 속에 각 엔진까지 이르는 통로가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이 다음 수송기는 프로펠러가 거꾸로 날개 뒤에 마련되어 있었는데 날개에 가해지는 와류가 덜하므로 항속거리에 잇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엔진 열을 식히는 데 한계가 있어서 표준으로는 자리잡지 못했다고 한다.

 

 

F-22는 어딜가나 있다. 에어쇼에서는 실전 배치된 랩터가 전시되기도 했다. 뿐 만 아니라 F-35가 나는 것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었다.

중학생때 환장하던 것들을 실컷 보고 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F-22 위에는 세계 최초로 폭격을 수행했던 라이트 형제의 'B Flyer'가 전시되어 있다. 둘을 나란히 보면 100여년의 기술 격차가 느껴진다.

 

 

 

B-2 스텔스 폭격기도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 기체는 실험용 기체로 엔진도 없고 콕핏도 달린 적이 없는 구조 실험용 기체라고 한다.

요구 강도의 1.6까지 버티는 게 목표였는데 실제로 1.61까지 버티고는 부러졌다고 한다.

그래서 마주보고 좌측을 보면 랜딩기어 인근이 부러져서 보강재를 덧댄 자국이 남이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두껍고 엄청나게 크다.

 

 

sr-71

 

SR-71. 최초의 전 비행기간 동안 애프터버너를 쓸 수 있게 설계한 비행기이다. 

고속 기동시 외부 온도가 수백도로 상승하게 되어 일반 항공유를 쓰지 못했고 대신 특수 제작한 JP7이라는 연료를 사용했다고 한다.

발화점이 굉장히 높은 이 기름은 불을 긋거나 스파크를 튀어도 불이 붙지 않는다고 한다.

특수 화학성분을 가해야 그제서야 불이 붙는다. 그래서 동시에 전자 스파크식으로 시동 걸지 않는 유일한 기체라고 한다.

그래서 엔진에는 비행 도중 시동을 다시 걸 수 있도록 화학약품 카트리지가 있으며 따라서 재시동횟수가 제한된다고 한다.

 

지상 발전기가 옆에 있었는데 이 특성상 초 고압으로 압축공기를 불어넣어줘야 해서 특수한 시동기를 사용한다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외피는 수축 팽창에 대비해서 다리 연결부처럼 expansion joint 형태를 취한다고 한다.

다만 눈에 보이진 않는다고.

 

 

 

오스프리는 박물관 주변의 한 공터에서 파손되어 수리를 기다리는 듯한 기체도 보았다.

이제는 개량형이 등장해서 안정적인 운용을 할 수 있도록 틸트 로터에서 엔진은 그대로고 날개만 움직이는 버전이 나왔다.

 

 

B-1 lancer도 덩치가 엄청나게 컸다. 사진 하나에 다 담지 못했다.

 

 

 

F-15 맨 앞 레이더 캐노피 마감이 십자 드라이버로 되어있었다.

 

 

Mig-29. 아주 형편없는 항공기라고 했다.

 

 

F-22에 밀려 결국 프로토타입으로만 남게 된 노스롭의 YF-23이다. 프로토 타입 한 기만 남았으니 하나뿐인 실물이다.

 

 

 

역시 테스트만 하고 결국 선정되지는 않은 발키리라는 폭격기이다. 직선형의 멋진 모습을 하고 있었고 어마어마하게 컸다. 역시 실물.

 

 

 

 

그리고 이 비행기가 바로 박물관을 두 번 오게 만든 그 기체였다.

JSF 프로그램에서 F-35에게 져서 선정에 실패한 보잉의 YF-32이다. 모습이 못생겼다고들 하는데 나는 오히려 이 디자인이 훨씬 멋지다.

박물관을 먼저 다녀가고 나서 1달 뒤에 이 비행기가 복원되어서 전시되었다. 그 전에는 노스캐롤라이나 해군 박물관 야외에서 전시되었다.

 

 

 

이렇게 하고 싶은 것들을 잔뜩 하고 돌아왔다. 마지막에 기념품 샵에서 하마터면 이상한 것들을 잔뜩 사올 뻔 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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