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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장자 - 장자

 

 

24/06/29

 

# 나의 취향은 내가 정하고 나의 판단은 내가 한다.

 

일상에서도 그렇듯 독서를 할 때도 마찬자기로 내가 일관적으로 취하는 자세는 내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어떤 인물이나 물체에 대하여 보통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평가가 존재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체로 이를 수용한다. 

각자마다 수용하는 과정을 어떻게 거치는지, 과정을 거치기는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각자의 몫이다.

 

각자가 어떤 대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것과 생각을 외부로 표현하는 것 모두 개인의 권리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내가 우상으로 받드는 대상에 대해 남이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굉장히 공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선망하는 인물이나 사물 또는 따르는 지론을 본인과 동일시 하는 인상을 받는다.

내 의견과 상대방의 것이 관점 혹은 각자가 처한 상황으로 인해 다를 수 있으며 서로 생각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이 자체가 각자를 적으로 만드는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우리사회의 이러한 현상의 근원은 이념대립의 과거때문일 수도, 인구 과밀화와 도시화에 기인한 것일수도, 유교사상때문일 수도 있다.

 

가령 오이가 싫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원하는 머리 스타일이 다를 수 있고 옷 취향이 다를 수 있다. 취향 차이인 것이다. 

본질적으로 취향과 선택은 각자마다 기준이 다르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 중에서는 타인의 취향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나는 그다지 기분이 상하지 않는다. 다만 가엾을 뿐이다. 골몰해야 마땅한 주제의 부재로 시선이 바깥으로 새는 것으로 보인다.

 

내 상황이 어떠하고 내 목표가 무엇인지를 마땅히 정한 사람들은 몰두할 것이 마땅하므로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덜 하다.

상대방의 의견을 의견으로 넘기고 이것 때문에 내 것이 공격당한다는 오해를 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인정한다.

오히려 외부에 민감한 사람들은 자기것이 비어있거나 자신감이 없는 경우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상대평가로 승부를 보고자 하는 그들은 나를 높일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남을 까내린다. 그렇게 하면 낮출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자신이 높아지는 걸로 착각한다.

 

 

# 공자와 장자, 장자와 노자

 

조선시대는 구성원들의 목표가 하나로 묶인 큰 조직으로 내 눈에 보인다.

구성원들은 왕이 잘 되어야 나라가 잘 되는 것이고 그래야 국가에 속하는 구성원들이 잘 되는 거라는 집단주의적 관계로 똘똘 뭉쳐있다.

왕, 왕을 모시는 신하, 양반, 양민, 노비, 천민 등 모두는 각자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수행한다. 각자의 삶의 목표는 외부에서 주어진다.

맨 위에 위치한 왕조차 역할과 의의가 규정되어 있다.  유교사상의 본질을 나는 이 집단으로 운영되는 사회를 위한 규칙으로 이해했다.

 

지금도 한중일, 동남아 등의 정치체계를 보면 이념이 잘못되었든 간에 내가 따르는 편이 있고 우리 편의 방향에 이견을 달지 않고 따른다.

효율적이고 성과가 높다. 이론대로 잘 운영된다면 모두가 웃을 수 있다. 하지만 성과 지표가 모든 계층을 위하지 않는다.

심지어 절대선이나 절대악, 도덕의 지표 등도 흔들리는 상황이 잦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속성이 떨어지고 변화에 취약하다.

우리나라는 전후 산업화와 발전을 이러한 집단주의에 힘입어 빠르게 달성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성장 뒤에 이어서 집단주의를 벗어나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현재의 상황을 나는 이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상황 자체는 답답하고 우스꽝스럽지만 전체적 흐름을 본다면 발전을 위해 겪어야 하는 누구나 거치는 과정이다.

 

사회생활을 꽤 했기에 섭리를 알고 있고 단체생활에서의 행동이 몸에 배어있지만 여전히 나는 공자 사상에 아주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일상에서 생기는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이 내겐 당연한데 '감히' 등의 보호를 받으며 궁금증조차 가질 수 없는 게 납득되지 않는다.

나와 관계없는 외부에 의해 내가 어떻게 될 거라는 근거를 물어서는 안 되는, 또다시 신성화 되어있는 계시를 들으면 우습다.

 

유사 이래로 수많은 개체가 있었고 그 다양한 삶 속에서 경향이 발견되었으며 이를 통해 나를 대입해볼 수 있다는 건 이해한다.

그렇기에 책을 읽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의견을 정할 때 참고한다. 하지만 과거의 흐름이 내게도 같을 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매일 전례없던 발전을 이루고 있는 요즈음이다. 그렇기에 귀기울이고 참고할 수 있겠지만 주체적이어야 하고 건전해야 한다.

나는 그래서 유교사상을 깊이 받아들인 사람에게 본질을 자주 묻는다. 내가 놓친 것을 마주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도가사상도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순응하는 삶. 너무 현실에 몰입하지 않고 현실 너머의 모습을 바라보는 삶. 현실도피처럼 느껴진다. 왜 그렇게 축 늘어져서 살아야 하고 욕망을 가지면 안된다고 말하는 걸까 싶었다. 

 

이 둘의 배경을 찾아볼 생각은 이제까지 하지 못했다. 책 덕분에 이 두 사상이 탄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을 듣게 되었다.

 

장자는 송나라 사람이며 기원전 370년경 태어났다고 한다. 당대는 전국시대로 전쟁이 일상인 피비린내 나는 시대였다.

이로 인해 그의 철학은 불안과 절망을 초월하고 극복하는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오래된 문화의 송나라는 문화적으로 유래가 깊었으나 당시 주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공자, 맹자는 주 / 노자 장자는 송나라 출신이다.

공자 맹자에는 빛나는 이상과 그 이상을 가능케하는 정치적 현실이 있었으나 장자 노자의 문화에는 무력감, 이상의 허무함이 가득했다.

 

이러한 배경을 보고 다시 보니 말이 안 된다고 느꼈던 구절들의 왜 생겨났는지 이해가 되었다.

 

- 행복이란 뒤집어놓은 불행이며 즐거움이란 뒤집힌 슬픔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은 잃는 것 없이는 얻을 수 없으며 망한다는 생각 없이는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 인생이란 그대로 이상과 연결되는 직선적인 것이 아니라 멀리 돌고, 뒤로 돌고, 기울고, 다시 반복하는 곡선적인 것이었다.

행복이란 뒤집어 놓은 불행이며 즐거움이란 뒤집힌 슬픔에 지나지 않았다.

 

- 이렇듯 만사 만물이 잘 조화되어 거침없이 흘러가는대로 맡겨두면 즐거운 마음을 잃지 않을 것이며, 밤과 낮으로 생기는 변화와 함께 한다면 자신도 변화하는 만물과 하나가 되어 만물을 생성하는 봄기운을 받아 새로운 조화를 창조해 나갈 수 있으니 이런 사랑이야말로 재능이 온전하다고 하는 것입니다.(덕충부)

 

- 명예를 추구하는 표적의 주체가 되지 말고, 계략을 일삼는 뫼의 창고가 되어서는 아니되며, 일을 맡아 처리하는 책임자가 되지도 말며, 지혜의 주인공이 되지 말라. (대종사)

 

- 사람들은 모두 유용의 쓰임은 알지만, 무용의 쓰임은 알지 못한다.(인간세)

 

 

# 책의 구성

 

총 7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이 다루는 내용은 이렇다.

 

제1 편, 소요유 : 무엇에도 속박 없이 자유로운 삶 영위하는 것. 절대 자유의 삶을 사는 신인 또는 지인의 자유무애의 경지를 논함

제2 편, 제물론 : 무엇에도 얽메이지 않는 절대 자유로운 삶을 위해 만물이 모두 하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내용

제3 편, 양생주 : 초월자로서 세속적 삶을 사는 지혜를 다룸

제4 편, 인간세 : 현실에 살면서 현실에 다치지 않는 법, 자기를 상실하지 않는 지혜를 밝힘

제5 편, 덕충부 : 세속에서의 형태적 집착을 타파하고 형상을 초월한 내면성을 덕이라고 설명

제6 편, 대종사 : 자연에 순종하고 구애받는 것 없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을 설명

제7 편, 응제왕 :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의 자격을 설명

 

혼란한 세상이더라도 외부와 독립되고 초월한 상태를 추구하라는 일관된 메시지가 계속적으로 느껴진다.

책에는 반복적으로 중니라는 인물이 자주 등장하는데 중니는 공자의 자라고 한다. 장자는 공자를 이상주의자로 규정하고 비판했다고 한다.

기억에 남는 구절을 기록해두었다.

 

 

 - 나에게는 의지하는 것이 있다. 뱀 껍질이나 매미 날개를 의지하는가?

망량이 그림자를 보고 물었다.

그대는 조금 전에는 걸어 가다가 지금은 멈춰 서 있고, 또 이제는 앉았더니 지금은 일어섰구나. 그대의 몸짓에는 왜 그토록 절도가 없는가?

그림자가 대답했다.

나에게 의지하고 있는 그대여! 나에게도 의지하는 그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 같네.

그러나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 역시 의지하는 것이 있어 그렇게 되는 것 같군.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뱀의 배비늘이나, 매미 날개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나를 주체성 없게 휘젓는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겠는가?

또한 주체적으로 살기 위하여 필요한 그것이 무엇인지 역시 알 수 없구려!

(소요유)

망량이 무엇인지가 궁금해 검색해보았는데 그림자 변두리의 좀 더 옅은 부분이라고 한다. 그림자의 그림자인 셈이다.

그림자의 그림자가 그림자를 보고 왜 그렇게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촐싹대느냐고 비아냥댄다.

더 종속적인 존재가 자신이 속한 존재에게 본인도 해당되는 흠을 비난한 것이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대입한 상황이 굉장히 재치있다.

그림자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지만 답변 속에는 뼈가 있다.

망량이라는 단어의 뜻을 적어둔 분의 글에 따르면 장자가 말하는 허상이 아닌 궁극적인 실체가 바로 자연(自然)이라고 한다.

자연은 망량이나 그림자, 뱀 비늘, 매미 날개 등과 같은 허상들의 근원이자 실체인 것이다. 

스피노자 책을 통해 자연(Nature, not nature)에 본능이라는 의미가 담겼다는 걸 조명해본 적이 있다.

이번에는 자연이라는 단어가 담는 의미 중 '실체'에 주목해볼 수 있었다.

 

 - 장주가 나비냐 나비가 장주냐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너풀너풀 춤을 추는 나비였다.

스스로 즐거워서 자신이 장주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잠에서 깨어보니 자신은 엄연한 장주였다.

대체 장주가 꿈속에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모른다.

그러나 장주와 나비에는 분명하게 구별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일러 변화라 한다.(원문에는 변화가 아닌 물화라고 되어있음)

(소요유)

해설은 존재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세계야말로 실재의 잔상이라는 어려운 말을 적고 있다. 무슨 말인지 몰라 이를 떼고 다시 바라봤다.

호접지몽이라는 단어를 교육과정에서 배울 때에는 물아일체, 무위자연과 이어져 있었다.

우리는 보통 '침대와 물아일체', 특정 제품을 비호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때 등 진짜로 물건과 내가 한 몸이 된 사례를 말할 때 사용한다.

장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장자도 침대와 물아일체를 말하고 싶었던 걸까. 저 변화는 무슨 뜻일까

 

 장주와 나비는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장주는 나비이기도 하고 나비는 장주가 되기도 한다. 이것을 변화라고 한다고 했다.

장자는 책에서 세상의 흐름을 자주 언급했다. 승리를 하면 지기도 하고, 행복 이후로는 불행이 온다.

또한 죽음을 두고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언젠가 없던 것이 생겨났고 그리고 다시 없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적힌 변화는 이 흐름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렇기에 나비가 장주이기도 한 것이다.

정리를 하면 '나는 어떠한 형태일 수도 어떠한 상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라는 것이다. 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제물론에서 자주 언급되던 만물이 모두 하나라는 걸 일깨워야 한다는 내용도 아마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걸 수도 있겠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것과도 이어진 느낌이 들었다.

 

-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으나 우리가 알고자 하는 앎에는 끝이 없다.

만일 부득이한 경우에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는 공명심을 가까이하지 말고 악을 행하는데 있어서도 형벌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장자는 자기의 삶을 온전하게 하는 것을 인생의 첫째로 삼는 사람은 선악의 피안에 서서 그 질곡에서 멀리 떠나갈 것을 가르쳤다.

즉 자기와 세속의 갈등을 최소한으로 좁히고, 홀로 자기의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는 일로서의 소요유를 마음껏 누리는 것이 양생의 비결이다.(양생주)

→ 자유를 추구하는 삶을 위해서 현실에서 멀찌감치 떨어저 지내라는 말이  전에는 전혀 와닿지 않았으나 배경을 보니 비로소 이해가 된다.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나 시비에 영향받아 감정적으로 소모하는 대신 그러려니 하고 무응답하는 것도 위에서 말하는 바와 방향이 같다.

다만 방법에 대한 내용은 따로 소개하지 않으므로 어떻게 그렇게 의연해질 것인지는 내가 직접 개척해야 한다.

 

- 사람이 내린 형볼은 풀 수 있어도 하늘이 내린 형벌을 어찌 벗길 수 있는가

무지는 노담을 찾아가서 말했다. 

저 공자는 지인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자꾸만 가르치려 합니까?

그는 또 세상을 괴이한 것으로 속여 명성을 얻으려 합니다.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만 지인에 있어서는 그러한 것이 자기를 구속하는 질곡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듯 하였습니다.

노자가 이를 듣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왜 그에게 죽음과 삶이 하나로 이어져 있고, 옳고 그름이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그 질곡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지 않았는가?

하늘이 그에게 내린 형벌인데 어찌 벗길 수 있겠습니까

(덕충부)

→ 장자는 공자를 이상주의자로 여겨 비난했다고 한다. 완곡한 비판과 함께 사유가 보인다.

 

 

# 후감

 

 논어, 맹자, 대학, 중용 그리고 시경, 상서, 주역

나는 장자가 사서삼경에 속하는 줄 알았다. 거기에 반가운 이름이라서 자전거 타다가 들른 알라딘 서적에서 선뜻 손이 갔다.

하지만 알고 보니 사서 삼경에 장자는 속하지 않는다. 덕분에 사서 삼경 외에도 한 권의 고전을 더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호접지몽 등의 원문을 직접 읽어볼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위인의 실체를 묘소에서 직접 확인했을 때 느낀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한비자도 장자와 비슷하게 전국시대의 혼란한 시대를 겪은 사람이라고 한다.

다만 장자가 외부적 혼란을 안으로 초월하려 했다면 한비자는 밖으로 통제하려 했다고 한다.

같은 현실을 다른 방법으로 타개하려 했던 인물의 사상도 비교해서 보고 싶다. 조만간 서점에 들를 이유가 또 생겼다.

 

 전에 읽었던 책에서 추천을 받거나 일상 중에 관심이 가는 책 등을 목록에 적어두고 이렇게 서점에 들를 일이 있으면 집곤 한다.

운이 좋게도 마침 상황에 맞는 책을 잘 만난 것인지, 아니면 구절 속에서 내가 원하는 주제들 위주로 내 눈에 든 것인지 모르겠다.

항상 그런 것처럼 이번에도 최근에 고민중이던 것들에 책의 내용을 비추어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