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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왜 글은 쓴다고 해가지고 - 백가흠

24/10/05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법령에서 요구하는 절차와 사양을 맞춰 건물을 짓는 일, 선험적 지식으로 후손을 낳는 것과 같이 이미 정해진 방법을 따르면서 만드는 것도 힘들지만 예술의 창작은 방식과 절차마저 내 손에 모두 달려있기에 훨씬 힘든 일이라고 여긴다.

무엇을 적을지, 어떤 방식으로 적을지 어디까지 채울지 내가 생각하고 결정내려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 결정들의 공통점이 수렴하는 방향이 올바른 곳을 가르키는지 내 스스로 되뇌어보면서 말이 되는지, 타인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상상해보는 것이 굉장히 고되었다.

 

창작의 고통이 어떠한지 느끼고 난 뒤에 나는 예술가들을 선망하게 되었다.

그들이 만든 작품을 감상하면서 우리는 일상과 우리의 영혼을 가꾼다.

나는 도무지 저 영역에 닿을 수 없다. 내가 쓰는 글은 객관적 정보를 담는 수단이고 시각자료는 한 눈에 들어와야 한다.

무엇보다 내게는 글쏨씨니 선천적 색감을 떠나서 남들과 나누고 싶은 사색도 없고 나눌 의지도 없다.

그래서 나는 예전부터  예술하는 분들과 접점을 대고 싶었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생활하는지 보고 싶었다.

백가흠 교수님과의 접점은 이 생각을 하기 시작할 즈음 어딘가에 있었다.

 

당시 나는 졸업반 학생이었다. 졸업요건은 이미 충족했기에 교양 강의와 아르바이트로 학기를 채워두며 마지막 방학을 즐기고 있었다.

이 강의 중 교수님의 글쓰기 교양강좌가 있었다. 나는 교수님의 수업을 한 분기동안 들었다.

교수님은 내가 직접 이야기를 나눠본 최초의 소설가였다. 자유분방하고 솔직한 분이었다. 

 

사회인이 된 이후로 이따금씩 신간이 나오거나 갑자기 떠오르면 교수님 작품을 종종 읽어보았다.

교수님의 작품은 항상 더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셨던 집필의 방식을 대 볼 수 있었기에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오토매틱 시계같은 느낌이 든 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교수님의 서정이 나의 그것과 굉장히 닮아있기 때문이었다.

노을 가득한 오후의 무료한 느낌이 가득찬 다소 우울한 분위기로 꿈 속에서나 볼 법한 줄거리라 펼쳐지는 것들이 굉장히 친근했었다. 

나는 미국 소설(드라마도 포함)과 한국 소설의 가장 큰 차이가 줄거리가 인물간 대사 속 내용에 있는지 / 진행되는 사건에 있는지를 기준으로 본다. 교수님의 소설은 한국식의 전형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체면치레 하지 않고 솔직하게 인간의 특질을 담는다는 점에서 김승옥 작가와 굉장히 닮아있다고 느낀다.

나는 무엇이든 작품을 감상하면 후감에 무얼 얻었다고 적는 것을 의무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교수님의 작품은 이 의무감을 잊게 만든다.

내가 모르는 내 서정의 새로운 부분을 편하게 찾아내는 느낌을 받기에 그냥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서정을 서사하라’고 교수님께서는 강의에서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서정은 정의를 넘어서서 개인이 지닌 고유한 감성의 형태이고 서사는 시간성이 부여된 이야기의 형태, 그리고 인간만이 주체가 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설명하셨다.

서정은 단순히 말로써 표현할 수 없고 오로지 서사를 통해 표현할 수 있으며 상대방은 이 서사를 통해 나의 서정을 짐작하는 순서인 셈이다.

서사는 역사 이래로 모든 방식이 이미 다 시도되었기 때문에 서사 자체를 새롭게 하기 위해 시도해본들 결국은 시시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서사보다는 서정 즉 본인만의 고유한 감성에 초점을 맞추어서 글을 적어야 한다고 하셨다. 

각자의 서정을 발견할 수 있도록 서점에서 자기에게 맞는 시집을 찾아보라고 하셔서 하루종일 서점에서 산 적이 있다.

실제로 덕분에 신기섭 시인의 분홍색 흐느낌이라는 시집에서 언어 너머의 무언가가 통한 듯한 그 찡함을 느꼈다.

예술작품을 감상할 적에 이따금씩 어쩌면 정확히 이 의도를 생각하면서 작가가 작품을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확신이 드는 때가 있다.

나도 언젠가는 이런 느낌을 이세상 딱 한명에게라도 느끼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것도 지금 생각해보니 이 시집을 읽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이번에 교수님께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주셨는데 나의 서정은 내가 가진 경험 뿐 만 아니라 못 가진 경험으로(결핍) 컴플렉스가 생겨 다시 여기에 기인한 서정이 만들어내는 서사가 있을 수도 있다고 하셨다. 음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에세이인 덕분에 이야기 속 숨은  뜻을 어렵게 파내야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 소설가 / 소설의 역할에 대하여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몇 번째 다시 보고 있다. 사르트르는 글을 쓰려는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이며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온갖 것을 모두 던져버리고 글쓰기를 하는 것이다.

유투버나 소설가나 세상에 자기의 생각을 소개하고 싶어하는 것은 같다. 다만 수단이 다를 뿐이다.

교수님께서는 겸손하게 주변 사람들 중 본인이 제일 글솜씨가 없는데 지금 돌아보니 자기만 집필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보기에 교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일상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이를 다시 나누기 위해 집필하는 능력도 뛰어나신 분이다.

나는 교수님께서 천상 소설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설은 동물원 사자에게 약을 먹이기 위해 사용하는 고깃덩어리 정도로 정의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추상적이고 그냥 들어서는 뭔 말인가 싶은게 많다. 복잡하고 재미도 없어서 타인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이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조미료를 타는 것이다.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과 이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조미료의 비율이 중요하다. 내가 꼽는 황금비율은 까뮈의 이방인이다.

교수님께서는 책에서 소설의 사회적 발전상과 의의를 언급하셨는데 이 관점을 대입해보니 내가 지금 쓰고 싶어하는 글의 방향이 가늠된다.

 

 

# 삶의 목표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삶의 목표를 묻는 것을 즐긴다.

우리나라에서 만난 사람의 대부분은 내가 이 질문을 시작해야 비로소 자신의 생각에 새로운 카테고리가 열리고 그제서야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우리는 바쁜 삶을 살며 매 순간 뛰어가고 있다.

내 질문에 대한 단골 대답은 정해져 있다. 90퍼센트 이상이 이 대답을 한다. 제주도의 카페 운영이다.

조건이 무한의 부라 해도 그렇다. 이 전제는 경제적, 현실적 제한으로인해 날개가 꺾여버린 사람들을 위한 후시딘 같은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 전제로도 그 상처를 치료하지 못한다. 일을 일단 하면서-라는 식으로 삶에 꼭 일정량의 무의미를 태운다.

교수님께서 그리스에서 한적한 식당을 운영하며 매일 석양에 몸을 파뭍고 싶다고 하셨을 때 의외였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이런 소망도 이제까지 내가 놓친 게 있을 수 있다.

식당만이 아니라 그 덕에 얻는 오후의 주황색 하늘과 한없이 늘어진 그림자 그리고 미지근한 바람도 삶의 목표가 될 수 있겠다 생각했다.

 

#기타

 

*나쏘메 소세키 - 도련님 / 김경리 - 토지 / 위화 - 인생(운명론적 인생관) / 제임스 설터 - 가벼운 나날(어쩔 수 없는 존재의 시간에 대한 고백) 등의 소설을 추천받았다. 읽어봐야겠다.

 

*소설을 읽을 적에 문장을 보기 위해서는 이야기도, 서사도 아닌 시간을 읽어야 한다고 언급하신 것이 이해될 듯 말 듯 하다.

 

*"의식은 허울이며 경험이 이를 대체해야 한다. 경험간의 교차점에서만 의식이 발현된다." 윌리엄 제임스의 말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새롭게 쌓인 경험으로 교수님의 영혼은 10여년 전 내가 뵈었을 때와 많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다만 경험도 굵은 게 있고 얇은 게 있을텐데 그간 유지되는 굵은 경험들에 기인하는 교수님의 영혼이 글에서 보이고 친숙함이 느껴지는 모습에서 그 때 그분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통해서지만 오랜만에 직접 찾아뵙고 이야기 나눈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