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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몰입의 즐거움 - 칙센트미하이


23.04.05

즉흥연주와 몰입도의 관계에 관한 세미나를 다녀온 적이 있다. 음악 전공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세미나라서 아내가 참여하게 되었는데 청강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나도 꼽사리 껴서 함께 듣고 왔었다.
자아를 잊어야 오히려 더 자아에 다가갈 수 있다는 칙센트미하이의 의견을 소개받았다. 짐짓 모순으로 들리기도 하고 어느정도 이해가 되려고 하는 그 아슬아슬한 느낌에 어느정도 공감이 가려는 듯한 느낌도 들어서 저서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책을 구매해서 읽게 되었다.

참가한 세미나의 중심 주제가 담긴 책이었기에 책의 결론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주제 외에 미국인 답게 충분히 차고 넘치게 쌓아둔 지식들도 즐겁게 담으면서 여유롭게 읽었다.

저자는 관념론자이다. 삶의 방향과 목표, 경험 등에 굉장한 비중을 두고 살았던 분이다. 이렇게 또 비슷한 방향의 삶을 살던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을 많이 느껴서 기뻤다. 덕분에 오랜만에 다시 유물론과 관념론 두가지를 따로 정리해보기도 했다.

육아에 대해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 유아기에 가족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과 제공해야 하는 것들 등등에 관한 의견을 보면서 많은 공감을 느꼈다.
개인적으로 항상 인과를 명확히 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인과가 없이 수동적으로 되게 오래 살았기에 지금도 이로 인한 부작용이 너무 많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마침 아기도 생각하는 시점이어서 관심이 자연스레 많이 쏠리는 분야인데 비슷한 방향으로 강회되어있는 분의 조언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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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선인들의 지혜에 귀 기울여는 한편 그 지혜를 과학이 꾸준히 축적해온 앎과 점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휴식, 생산, 소비, 교제의 순환처럼 우리네 삶의 경험 세계를 이루는 또 하나의 영역이 있다. 그것은 보기, 듣기 같은 감각의 장이다.

엇비슷한 제한 요소들이 만인의 삶을 규정하는 것도 사실이고, 누구나 쉬고 먹고 어울리며 최소한의 노동을 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경험의 내용을 판이하게 만드는 사회적 범주로 인간이 구분된다는 것도 부인 못 할 사실이다.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는 것은 사람마다 개성이 있기 때문이다.

삶은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서 경험이다. 그런데 경험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시간은 아주 귀중한 자산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에 따르면 학문, 예술, 정치 같은 자기개발 활동에 시간을 투여할 수 있을 때만 우리는 진정한 어른이 된다. 실제로 학교를 뜻하는 영어 단어 'school’은 여가를 뜻하는 그리스어 scholea 에서 나온 것이다. 여가를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이 곧 학문하는 길임을 알 수 있다.

삶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뿐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과 함께 있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가령 전통 힌두교 사회에서는 사람을 뚜렷이 구분되는 개체로서가 아니라 확장된 사회적 연결망의 교점으로 이해하였다.
문화가 아무리 개인주의 방향으로 흐른다 하더라도 개인이 누리는 삶의 질은 타인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동양의 종교들은 행복에 이르려면 욕망을 버리라고 가르치는데 이것을 모든 욕망을 포기하여 더 이상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해야만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자는 동양 철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목표를 덮어놓고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마음 속에 저절로 생겨나는 의도는 신뢰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궁핍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우리의 유전자는 부득불 탐욕스러워지고 남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힘을 갈망하게 되었다.

자신의 목표를 다스리는 방법은 자기 욕망의 뿌리를 이해하고 그 안에 숨어 있는 편견을 인식하면서, 사회적, 물질적 여건을 지나치게 흩뜨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의식에 질서를 가져올 수 있는 목표를 겸허하게 선택하는 것이다.
이보다 덜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며, 이보다 과도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좌절을 자초하는 셈이다.

가정의 형태가 아무리 변화무쌍하게 펼쳐져 왔다고는 하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요소가 있으니, 그것은 곧 성이 다른 두 어른이 결합하여 서로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면서 자식에 대해 책임을 함께 나누어 가진다는 사실이다.

소련, 이스라엘, 중국, 그 어떤 사회에서도 가정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다른 골격의 사회제도를 밀어넣는데 실패했다.

원만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비결이 무엇인가에 대한 글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내용은, 식구 하나하나의 정서적 안정과 성장을 뒷받침하는 가정에는 두 개의 거의 상반된 특성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원칙과 자발성, 규율과 자유, 높은 기대와 무조건적 사랑의 공존이다. 기운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원칙과 규율이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목표를 추구하는데 나의 시간이 건설적으로 투자된다. 그러면서도 식구들은 필요할 는 가족 전체로부터 정신적 후원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복합적인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실력을 닦고 과제를 깨닫는 기회를 갖게 되어 살아가면서 몰입 경험을 남보다 많이 할 확률이 높다.

자기목적성을 가진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가족과 지내는 시간이 유달리 많다는 점이다. 가정이라는 보호막 안에서 아이는 구태여 자의식을 느낄 필요도 없고 방어 의식이나 경쟁심을 느낄 이유도 없이 편안하게 이런저런 실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조숙하다는 건 별 의미가 없다. 너무 일찍부터 독립된 생활을 꾸려나가야 하는 젊은이는 그만큼 심리가 불안하고 방어 의식에 젖기 쉽다. 성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인생살이가 복잡하면 할 수록 청소년은 거기에 대비할 수 있도록 가정에 의존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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