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24
접한 배경
릴레이 식으로 전에 읽은 책에 언급된 책들을 이어서 읽는 중이다. 마침 중고서점에 방문하여 다른 책을 찾던 중 눈에 띄어서 집게 되었다. 유시민씨의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소개받아 적어두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의 내용
디종 아카데미가 기획한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 에 관한 현상 논문에 응모하기 위해 루소가 적은 글이다. 그가 이에 앞서서 쓴 학예론을 연장하고 보완하는 책이기도 하다.
“자연 상태에서는 불평등을 거의 느낄 수 없었으며 그 영향도 거의 없다. 불평등의 기원과 발견을 인간 정신의 지속적 진보에서 기인한다.”
그는 불평등이 문명의 발전 탓에 생겨났고 이는 자연법에 위배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자연법이란 공동의 이익일 수 있는 서로가 공유하는 규칙으로 스스로 안정되려는 본능 / 생명이 다하는 행위에 동정을 느끼는 경향 등이 포함된다.
자연 상태에서는 불평등을 거의 느낄 수 없었으며 그 영향도 거의 없다. 불평등의 기원은 인간 정신의 지속적 진보와 문명의 발전으로 인해 자연법을 거스르고 실정법이 생겨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책에서는 말한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생활하던 원시 시대를 추측하면서 작금의 불평등한 사회로 발전해온 과정을 그는 추상한다. 그가 소개한 과정은 다음과 같다.
(다만, 불평등을 현상적으로만 바라볼 뿐 이걸 어떻게 하자는 대책은 책 내용에 나오지 않은 채 마무리된다.)
1. 인간이 가진 최초의 감정은 자기 보존이었다.
2. 다음으로 자기의 종을 영원히 존속시키고자 했다.
3. 점차 인구가 증가하고 새로운 도구를 사용할 줄 알게 되었고 인간에게는 크다/작다 강하다/약하다 등의 비교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4. 지식이 늘어나면서 타 동물에 대한 우월감을 자각하게 되었다. 동시에 동족 간의 공통점을 지각하면서 공동의 이익에 대한 개념이 생겨났다.
5. 이 때부터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함께 지켜야 하는 규칙을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안락의 추구라는 제일의 원칙을 기준으로 한 협력을 위한 규칙들이 생겨났다. 이를 통해 상호간의 약속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6. 이렇게 상호 교류하는 상황이 생겨나면서 언어가 생겨났다.
7. 가족의 단위가 생기기 시작했다. 남녀가 한 곳에 정착하면서 부성애의 개념이 생겼다. 같이 거처하는 인공물 형태의 집이 생기고 소유의 개념이 생겼다.
8. 가족 구성원 간 역할분담이 생기기 시작했다.
9. 여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0. 사랑과 질투가 생기고 상호 교류가 늘어나면서 서로를 주목하게 되었다. 동시에 주목을 받고 싶다는 욕망도 생기기 시작했다.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하나의 큰 가치가 되었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 춤을 잘 추는 사람, 잘 생긴 사람등이 생겨났고 이게 불평등, 악을 향한 첫걸음이 되었다.
11. 이어서 개인에 대한 평가, 존경에 대한 개념이 생겨났다. 모욕, 무례 등이 생겨났으며 보복이 생겨났다.
12. 이로 인해 인간은 본래 사악하므로 이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규제와 단속이 필요하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13. 게다가 인구가 늘고 생산품의 수요도 증가하면서 이를 충당하기 위한 기술이 개발되었다. 기술 편차가 발생했다.
14. 경작은 필연적으로 토지의 분배라는 문제를 낳았다. 소유라는 정의가 생겨났다.
15. 기술, 지능, 신체적 편차 등이 서로 결합하고 환경의 차이도 한 몫 거들어 사유재산의 차이가 벌어졌고 이제는 부유하다면 봉사하고 가난하다면 그들의 원조가 필요하다는 개념까지 생겨났다.
16. 기존에 가축과 토지만으로 부가 표현되던 것에서 발전하여 화폐가 등장했다.
17. 강자와 약자의 편차가 커진 가운데 모두가 평등하게 서로의 의무에 따르게 하는 규칙, 즉 법이 생겨났다.
이는 약자에게는 새로운 구속을, 강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부여해 자연적 자유를 파괴하고 소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구히 고정시켜 교활한 횡령을 당연한 권리로 확립시켰다.
불평등을 경험한 사례
내가 불평등을 인식한 가장 첫 순간은 중학교 무렵으로 기억한다. 영어 숙제가 있었다. 같은 반 학우 전체를 통틀어서 나 빼고 모두가 숙제를 하지 않았다. 나 만이 그 숙제를 했다. 난이도가 꽤 되었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해낼 수 있는 과제였다. 하지만 나는 비교적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어렸을 적부터 선생학습을 받은 덕에 또래보다 영어실력이 앞서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숙제를 하지 않은 사람은 하교시간 후 남으라는 선생님의 엄포를 거스르지 않고 당당하게 하교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명령을 어긴 데 대한 두려움을 느끼며 하교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죄책감을 느꼈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가끔 가다가 친구들은 내게 장난을 섞은 농담을 건네곤 했다. '고등 영어를 하는 놈'이라는 말이 항상 나는 거북하고 부끄러웠다.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도 이 기억은 계속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있었다.
최근에 그 때를 회상하면서 과연 당시 내가 느끼던 죄책감이 적절한 것이었는지를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아이를 낳는 시점이 되어서 그 때 당시의 나를 자식의 입장으로 두고 바라보았던 듯 싶다.
골몰의 끝에서 내린 결론으로는 당시 내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 불공평이 아니며 나와 타인이 시간을 다르게 활용한 것에서 기인했다는 것이었다.
신나게 놀 수 있는 시간에 나는 상당한 시간을 들여 울며 불며 엄한 선생님 밑에서 영어 수업을 한참토록 강제로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여건인지, 그리고 배운 내용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 등도 불평등의 척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성인이 아니기에 자유의지가 아닌 부모님의 지시에 따른 나로서는 그것까지 내 몫의 불공평으로는 담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 때 부모님께서 베푸신 경험은 지금까지도 내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굉장히 감사함을 항상 느낀다.)
나는 꼼수를 부린 게 아니라 상당한 노력을 들여서 그 실력을 갖춘 것이었다.
나 자체와 타 동급생과의 비교만 한다면 이는 불공평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본다면 이 역시도 미리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는 상황의 여부나 같은 시간동안 학습하더라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능력 차이 등은 역시 불공평하다고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독서 후의 사색. 내 나름대로의 결론
후감을 정리하기까지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다. 읽을 때마다 눈에 담기는 내용이 달랐다. 종국에는 처음과 정반대 방향의 후감을 얻었다.
표면에 적힌 내용과 작가가 의도하는 바가 굉장히 꼬여있다고 생각한다. 책에는 결론이 나와있지 않다. 발제까지 나와있고 그 뒤를(대안을) 채우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처음에 읽고 나서는 굉장히 못마땅한 느낌이 들었다. 공감을 전혀 이루지 못했다.
'자연법에 의거하는 삶을 벗어나면서 불평등이 생기므로~' 라는 뉘앙스에서 무위자연 / 공수신퇴 / 반진귀박 등의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실이나 진리를 쫓기보다는 순박한 자연의 상태로 돌아와 사는 것, 교리를 따르고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 순리를 따르며 내 주어진 역할에 전념하는 것. 이러한 삶은 내게 너무나 거북하다.
첫 독서를 마치고서 생각한 그의 노선은 노자의 도덕경과 같아보였다. 이성이나 경쟁심, 사회, 예술, 철학이 불평등을 야기한 주범이라고 몰아세우는 대목도 눈에 거슬렸다. 그러면서 먼저 읽었던 에밀을 보았을 때 얻었던 부정적인 인식까지 떠오르기도 했다.
마치 문명 때문에 인류의 불평등이 이렇게까지 벌어졌고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원시시대로 살아가야 한다! 라는 것으로 당시에는 들렸다.
게다가 무책임하다고 느꼈다. 인간의 불평등이 문명의 발전때문이라고 몰아세우고는 정작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나 대안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이 후딱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얼른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후일에 다시 이 내용을 상기하게 될 적에 도움을 주려면 후감을 적어 두어야 하기에 책갈피 해둔 부분과 해제를 차근히 다시 읽어보았다. 그런데 해제의 도움을 받고 서두부터 다시 읽으니 다르게 보였다. 처음 읽었을 때 오해한 내용이 많았다.
그는 불평등의 원인으로 문명의 발전을 지목했고 자연법을 거스른 시기부터 불평등이 생기기까지를 훑었다. 그렇지만 정작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말하고자 했다고 생각한 것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말 끝을 이어서 거기까지 내가 스스로 걸어들어간 탓이었다.
자연법을 따르던 태고의 시절은 기록이 없으므로 정확하게 추측할 수 없다. 루소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자연에 대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어쩌면 결코 존재한 적도 없고, 아마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듯한 어떤 상태'라고 말한다.
또한 자연법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며 여러 사람들이 동일한 주제로 숱하게 시도하고 있지만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서 마땅하게 해낸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이지 않은 것의 경계는 굉장히 애매모호하다.
후감을 정리하면서 나는 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이지 않은 것이 과연 다른 걸까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의 인간사회도 시점의 차이일 뿐 자연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동식물이 그러하듯 인류도 자연의 일부이다. 그리고 인류가 행하는 것 중 그 어떤 것도 자연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우리의 행위나 사고 모든 것들도 자연에 종속되어있다.
우리는 지금도 자연법을 따르고 있다. 인류의 진보에 따라 발생하는 불평등은 필연적이다. 이 역시도 자연적이다. 오히려 평등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부자연스럽다. 다양한 타 생물에서도 엿볼 수 있다. 우리가 육안으로 보기에 펭귄무리나 돌고래 무리는 외형에서, 그리고 그들의 행동에서 모두 편차 없이 일괄적인 듯 얼핏 보이지만 엄연히 그들 사회 내에서도 능력과 계급이 존재한다. 편차가 분명하게 있다. 약한 자는 번식을 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며 무리에서 우위에 있는 개체는 번식 등에서 우위를 가진다. 이렇게 집단은 존재하며 때로는 더 늘어나기도, 때로는 전멸하기도 한다. 모두가 경쟁이다.
편차로 인해 일부 개체가 고통받을 때 상류층에게서 무언가를 빼내어 평균 수면 아래로 내려앉아있는 부분을 채운들 그 구배는 다시 생긴다. 오히려 이는 전체를 왜곡 시켜서 모두를 가라앉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경향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자연의 하나로 보아야 하는게 옳다고 생각한다.
아마 공산주의에 대한 구상이 이 시대즈음부터 하나 둘 시작한 듯하다. 그가 불평등의 발전 과정을 언급할 적에 몇 구절에서 사유재산 철폐 등 공산당에서 표방하는 주 내용 일부가 등장한다. 어쩌면 내가 받아들인 것처럼 그의 의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이러한 구절에서 평등 사회를 위한 힌트를 얻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도가 어떻게 귀결되었는지 이미 알고 있다. 그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공산주의야말로 자연적이지 않은 사회인 것은 자명하다. 시점상 그가 앞서있는 만큼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도 같다.
실제로 루소는 책에서 자연상태나 독재정권의 상태는 거의 차이가 없다고 그는 말한다. 이 구절을 다시 보게 되면서 자연에 대한 그의 입장을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정직한 것에 대하여 아무런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전제군주제야 말로 불평등의 마지막 도달점이며 우리가 순환을 마감하면서 이르게 되는 출발점이자 종점이다. 여기서는 모든 개인이 다시 평등해진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신민은 이미 주인의 의지 외에는 아무런 법률도 갖지 않으며 주인은 자기의 정념 외에는 아무런 규범도 갖지 않으므로 선의 관념이나 정의의 원리가 다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모든 일이 다만 최강자의 법률로, 즉 하나의 새로운 자연 상태로 귀결되어 있다. 이 자연 상태와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은 자연 상태의 차이는 후자가 순수한 자연 상태인 반면 전자는 지나친 부패의 결과라는 데 있다. 그러나 이 두 상태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으며 정부의 계약은 전제군주제에 의해 너무 많이 파기되어 있으므로...'
다만 불평등까지 자연의 속성이기에 받아들이고 감내하자고 받아들이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언급하는 요소들 중 일부는 우리 스스로가 부여하는 불평등도 있다. 존경받는 자를 바라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질투심을 느끼는 것이나 나보다 더 큰 재력적인 여력이 있어서 화려한 것들을 향유하는 사람이 부러워서 그 모습을 좇고자 사지하는 모습 등. 대부분 외부와의 교류가 잘못된 방식으로 이어진 까닭에 발생하는 것들이다. 나의 요소에 집중하고 나를 우위에 두고서 외부와 동등하게 교류를 한다면 느끼지 않을 것들인데 나를 공고히 하지 못한 상태에서 교류를 하다 보니 발생하는 오류들이다. 이것들은 내가 스스로 내게 부여하는 불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의지가 있고 바른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면 이러한 불평등에서는 의외로 손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나는 살면서 자기 자신을 타인보다 아래에 두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다만 무의식의 영역에서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오지 못했을 뿐이다. 이런 점을 의식하여 나를 나 답게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내게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를 자연의 사회에서 굳이 허덕이는 상황으로 스스로를 떠미는 것만은 멈출 수 있다.
이번 기회로 불평등을 어디서 찾을 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기존에는 책에서 루소가 집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태값에 초점을 맞추었다.
더 가진 자, 더 능력있는 자, 더 명성을 지닌 자
하지만 상기 값은 결과값들이다. 이는 종속적인 것이고 이들이 매달리는 고유값,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태도이다.
1953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폐허였다. 전부라고는 절대 할 수 없지만 다수가 평등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70년의 세월이 흘렀고 터전을 송두리째 잃은 다수의 사람 중 일부는 다시 일어서서 번영을 누리고 있다. 이 과정이 전적으로 각자의 태도 차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한다.
전 직장의 창업주께서 그러했듯 현상에 무릎꿇지 않고,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접하고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서 진보를 계속 이루어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나 만큼은 사회가 불평등한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는 요소가 바로 내 태도에 달려있다.
동시에 태도가 아닌 불의나 환경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도 고민이 필요하다.
*이렇게 보니 에밀이나 도덕경의 진의를 내가 지나친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표면상의 의미 아래로도 한 층이 더 있을 수도 있겠다. 다시 읽어보아야 겠다.
*그간의 독서행위는 돌이켜보니 굉장히 수동적이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밝히는 데만 집중해 있었다. 남긴 기록도 책갈피 해둔 책 내용 그대로를 기록해두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새해에는 이번과 같이 독서를 발판삼아 특정 주제에 대한 내 의견을 좀 더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으로 만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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