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28
예술품 중 창조 과정에서 대량생산적 요소가 관여하는 부류에 나는 거부감을 느낀다.
(소설이나 음악과 같이 작곡이나 집필하는 창작의 순간이 아닌 이를 담고 파급력을 높이기 위한 과정에서 대량생산을 거치는 방식들은 제외다.)
팝아트나 포스터, 판화 등 작가가 마음을 먹는다면 언제든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그리고 만들 때마다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제작이 가능한 것들에서 무얼 주목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나무 젓가락들의 무늬는 다들 고유하다.하지만 의미가 없다. 그냥 기계를 거쳐 가공된 물건일 뿐이다.
물론 이는 내가 아직 이 기법들이 가진 고유한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원본성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작품들도 내겐 그다지 와 닿지 않는다.
'바로 그 것', '믿고 보는 ~' 등 타인이 부여해 둔 크레딧을 자기 스스로의 판단 없이 수용하며 귀하게 여기는 것들에는 공감되지 않는다.
'비싸야 하기 때문에 비싸게 파는 것들', 유행 타는 이유가 있겠거니 해서 관심을 갖는 경향과 비슷한 인상을 받는다.
다만 수많은 예술 작품 중 주류의 인정을 받아 세상에 자주 주목 받고, 그리고 그 덕분에 대중에 자주 노출되고 그렇기 때문에 명성이 있는 작품들 위주로 대중은 접할 수밖에 없는 섭리와 이를 기준으로 취향이 자라는 와중에 내 고유한 취향을 고를 수밖에 없는 현실은 이해하고 있다.
영화 장르에 대해 내가 그다지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은 위의 두개에 모두 해당되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는 각본에 적힌 내용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대량생산적 요소 (연속적이지 않은 시점에 찍고 난 뒤 후처리를 통해 잇고, 배우는 내용을 재현할 뿐 당사자가 아님) 가 많이 관여한다.
각본을 시각화하는 행위로만 영화를 정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각본은 틀을 잡는 역할만 할 뿐 영화를 구성하는 세세한 내용은 영화가 스스로 실현해내는 영역이고 이 권한은 각본가가 아닌 디렉터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의 의견을 다수의 대중에게 전파하기 위해 내용이 확정된 글을 책으로 찍어내는 행위와는 다르다.
여기에 더해 영화는 단위 시간동안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내용이 내 기준으로 너무 많다.
받아들인 것을 곱씹어볼 시간도 없이 끊임 없이 다음 정보가 전달되는 것이 굉장히 버겁다.
이 때문에 나는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몇 번이고 돌려보아야 한다.
내가 좋은 인상을 받았던 영화들은 이런 식으로 여러번 돌려보면서 표현 기법이나 메시지를 분석해가며 감상한 것들이다.
그렇지만 1시간은 그냥 넘는 긴 작품을 이렇게 반복적으로 여러번 보는 것은 정말 곤욕스럽다. 그렇게 자연스레 나는 영화를 자주 안 접하게 되었다.
나는 작품을 감상할 적에 찬찬히 느긋한 호흡으로 뜯어보는 것이 좋다.
작품의 심지 속에 담긴 주제가 무엇인지, 이 주제가 작품의 전체 면적에서 얼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지, 그리고 주제 외의 영역은 텅 비어있는지 아니면 작가가 있는 힘을 다 해서 채워 넣었는지, 방대한 나머지 텅빈 공간은 어떻게 꾸며져 있는지, 두서가 있어보이는지 등등
작품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도 몰랐던 나의 취향을 하나하나 찾는 것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대상들은 이 점에 잘 들어맞는다.
유화, 글, 클래식 음악 등은 고정되어 있다. (물론 음악은 연주자마다 실현하는 방식이 매우 다르다. 하지만 나는 이 세세한 구분을 하는 것은 즐기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의 버전은 정해져 있고 나는 그 음악만 듣는다.)
그래서 나도 움직이지 않고 정적으로 찬찬이 시간을 들여서 품고 바라볼 수 있다.
교향곡과 같이 긴 음악이더라도 시간단위의 정보 전달량이 내 능력치 범위 내에 있다.
덕분에 길더라도 즐겁게 즐길 수 있고 여러번 듣더라도 길을 찾기 쉽다.
이러한 사유로 예술에서 대량생산 / 아우라 라는 단어를 대척점을 두고 대립하는 개념으로 보고 있었는데 이 단어들이 동시에 담겨있는 제목을 가진 책이 하필 서점 서재 맨 위에 너무나도 눈에 띄게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손을 뻗지 않을 수 없었다.
책 덕분에 나는 아우라 / 영화 / (석판)인쇄술의 의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 아우라, 원본성에 대하여
원본 진위여부는 특정 예술품의 가치를 입증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이다.
명성 높은 작가의 작품 원본을 얼만큼 소장하고 있는지가 미술관 위상의 척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배경지식 상 취향의 기준점이 유명한 작품 위주로 정렬되어 있기에 누구나 명성에 마음이 기울수밖에 없다.
예술사에서는 이 원본성이 흔들리는 시점이 있었다. 바로 현대미술 또는 현대문화예술에서 대량생산적 요소가 접목되기 시작한 순간이다.
기술의 발전은 작품과 관람자의 거리를 단숨에 해소해버렸다.
과거에는 음악이나 연극을 실황이 아니고서야 보관할 수 없었기에 피아노가 지금의 아이팟 위치 즈음에 있었고 (쓰고 보니 아이팟이 피아노와 피아니스트의 역할을 한다라고 표현하는게 맞겠다.) 놀이패가 동네에 오지 않는 이상 연극을 볼 수 없었다.
예술을 보관할 수 없었기에 존재 자체로 아우라가 있는 시절이 있었다.
반면 지금은 인터넷에만 연결되어 있다면 언제든지 듣고 싶은 음악, 다시 보고 싶은 글, 그림에 접근이 가능하다. 게다가 어느정도의 통신비용이 들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대중성을 띄는 작품들은 사실상 접근에 비용이 들지 않는다.
나의 경우 아무래도 이전 세대를 겪지 못 했기 때문에 예술에 제한없이 접근하는 환경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벤야민의 소개 덕분에 원본성 - 제의적 가치 / 전시적 가치를 연결지어 보았고 그리고 기술적 복제가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과거의 수공적 복제가 이뤄질 당시 복제품에 비하여 원본은 유일무이함이라는 우위를 가졌다.
지금도 짝퉁 시계나 예술 모조품 등으로부터 원본은 물리적 실체로서 유일무이하다는 특성을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덕에 권위를 유지한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복제가 시작되면서 (사진, 영화, 음악 등등) 유일무이함이라는 특성으로 유지되던 아우라는 전통적인 가치로 여겨지면서 손상되었다.
반면 '원작에 자립하여 대상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며, '수용자에게 더 다가갈 수 있다'라는 점에서 새롭게 얻은 것도 있다.
기존 수공적 복제품과 다르게 기술적 복제는 수용자가 예술품을 소유할 수 있게 함으로써 유일무이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혹자는 책을 읽지도 않고 소유만 함으로써 이 책의 내용을 얻었다 라는 식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는 사람도 생겨나는데 한 몫을 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예술의 영향력을 기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종래의 제의적 가치를 청산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초상화를 대체하며 대상을 기리는 용도로 활용되거나 / 종교적으로 신을 대상화하고 만든 조각이나 그림이 폐쇄적으로 다뤄지던 시절을 지나(함부로 대할 수 없고 한정적이며 좀처럼 바라볼 기회도 없고 관람할 수 있는 자격 자체도 제한이 있던) 이제는 초상화보다 훨씬 정교하면서 동시에 쉽게 찍고 인쇄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어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이 덕분에 '순수 예술'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술의 목적 자체가 기술적 복제 덕분에 제의에서 향유할 수 있는 무언가로 바뀐 것이다.
문학도 마찬가지로 기술 발전으로 신문이 보급되고 글에 대한 대중의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종래에는 제한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던 것에서 점차 독자층이 넓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독자들의 투고도 상승했으며 차츰 작가와 독자간 구분이 사라졌다.
자기 표현의 욕구를 실현하게 한 도구로서 문학은 다른 분야에 앞서 먼저 발전했다.
# 영화에 대하여
'영화는 자신의 참된 의미, 자신의 진정한 가능성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자연스러운 수단, 탁월한 설득력을 가지고 동화적, 불가사의한 것, 초자연적인 것 등 모든 요소를 표현하는 탁월한 우수성을 영화는 가지고 있다.' 라고 아돌프 라인하르트는 말했다.
선전의 도구로서 영화(와 영상매체 일체)는 자주 활용된다. 메시지를 설득력있게 관람자에 전달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시각 뿐 만 아니라 청각 그리고 최근에는 공감각적인 시도까지 곁들여서 몸과 마음을 오롯이 작품에 몰입하게 한다.
학창시절 영화를 보고 한동안 몸을 감도는 여운을 느끼며 지냈던 기억이 있다.
다만 선술했듯 가끔 여러가지 요소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용량을 넘어서 꽉꽉 채워두는 경우 오히려 나는 거부감을 느끼곤 했다.
사람들은 영화배우를 만나면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악수를 하려고 하고 사인으 받으려는 심리는 미술관에서 유명한 작품을 볼 때 내가 이 그림을 보았노라고 인증하려고 하는 심리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아우라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극 중 주인공과 이 배우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역할을 맡은 배우의 말투 / 외모 말고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으로는 극 중 주인공과는 엄밀히 말해 관련이 없다.
오히려 이 영화 저 영화에서 다른 캐릭터로 등장하는 모습에서 나는 혼돈을 느낀다.
나는 그래서 배우의 개인과 캐릭터로서의 관계를 구분해서 보려고 한다. 하지만 이를 혼돈하는 사람들이 왜 있는지 항상 의문이었다.
벤야민은 이것을 두고 연극과의 경쟁에서 아우라의 부재로 열위에 놓은 영화계가 우위를 얻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극 자체가 진행되는 동안 예술이 실재하기 때문에 관객과 소통이 가능하고 이 덕분에 아우라가 있는 연극과 달리 이것이 없는 영화는 아우라를 불어넣기 위해 작품 대신 스튜디오 바깥에 인위적으로 유명인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영화 자본에 의해 스타숭배가 장려되는 모습을 보면 일 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뒤아멜이라는 사람은 '영화는 노예를 위한 심심풀이이다. 일의 피로와 날마다의 근심으로 지쳐있는 비참하고 교양 없는 사람들을 위한 오락이다.'라고 말했다.
그 전까지의 예술은 감상자가 정신을 집중하면서 작품 속으로 자신을 침잠시켰다.
반면 어떤 예술은 작품을 통해 정신을 분산시킴으로써 예술작품을 자신에게 침잠시키기도 한다.
기술은 변화에 대응한 현대 지각의 변화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신이 분산된 상태에서 일상적으로 체감되는 촉각적인 수용 방식의 대중화 현상을 주목해야 한다고 벤야민은 말한다.
영화야 말로 이러한 수용을 숙련화하는 최적의 도구이다.
말하자면 그 전까지 대중은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몰입할 무언가를 찾아 향유했다면, 이제는 과도한 업무과 몰입으로 인한 스트레스 가득한 삶에서 여가로서 정신을 분산할 만한 거리를 찾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은 정 반대의 모습을 했지만 사실 목적은 동일한 셈이다. 이는 영화 뿐 만이 아닐 것이다.
저 말에 따르면 나는 영화를 잘못된 방향으로 즐기고 있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서 머리에 오래 담겼다.
#석판, 동판의 인쇄기술적 의의
나는 지금도 판화를 예술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특히 동판은 굳이 붓을 이용하지 않고 작품 하나를 위해 판을 하나 만들어서 찍어내는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치 싱싱한 오이를 먹고 싶어서 마트에서 오이소박이를 사다가 양념과 간을 씻겨내고 시든 모양을 보완하고자 인공 물감으로 채색한 뒤 싱싱해보이게 만드는 것처럼 번거롭고 자연스럽지 않은 행위로 느껴진다.
석판화는 그냥 정으로 비석에 보이는 음각 글처럼 활자를 만들어서 인쇄를 하는 원시 기술인 줄로 최근까지 알고 있었다가 매끄럽고 기름, 물 등에 반응하지 않는 석표면을 활용한 인쇄기법이라는 것까지만 최근에 간신히 알았다.
석판화는 인쇄기술의 발달사에서 그림의 대량 인쇄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활자 인쇄를 통해 글의 대량 보급이 가능해진 것처럼 석판인쇄술 덕분에 삽화 등이 활자와 함께 대량인쇄물에 붙어 정보의 파급력을 높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방식에 기인한 특유의 분위기가 예술의 장르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백과전서나 예전 기록물 등에 등장하는 그림은 붓이나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 그림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것이 이제야 조금 보인다.(그래도 아직 매력을 잘 모르겠다.)
덕분에 인쇄술에 대해서 더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이것 저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석판 : 석판에 물리적 자극을 가하지 않고 평면 위에 물과 기름의 반발성을 이용하여 인쇄하는 방식. 종이에 특정 부분에 가해진 잉크만 묻도록 하여 이미지의 대량 인쇄가 가능하다.
옛날 신문에 보이는 삽화가 다 석판으로 인쇄한 것이라고 한다. (회색 배경의 그림들)
*동판 : 부식 방지제를 뿌리고 못으로 그림을 그린 뒤 산에 통으로 담궈 못이 긁힌 자국만 부식되어 깎여나가도록 해서 그 부위에 고인 잉크를 통해 인쇄하는 방식
*활판 인쇄 vs 오프셋 인쇄
- 활판인쇄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글자별로 따로 활자가 있어서 이를 문선(필요한 활자를 골라내는 일)하고 식자(골라놓은 활자를 하나하나 제 위치에 배열), 조판(식자로 한 페이지용 판을 만듦) 하여 인쇄하는 방식.
이 활판을 이용해서 직접 인쇄하는 경우 원 활자가 빨리 닳으므로 이를 습기를 먹인 형지에 눌러 찍어서 굳힌 후 납 주석 알루미늄 합금을 부어 2차적으로 연판을 제작한 뒤 이 판을 이용해서 인쇄한다.
책의 맨 뒷면에서 보통 찾을 수 있는 인쇄 정보를 보면 '초판 1쇄' 등의 표현이 있다.
여기서 판이 다르다는 건 새로운 판면을 만들었다는 뜻으로 내용의 변경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쇄는 연판을 말하는 것으로 쇄 번호가 다르다고 해서 내용이 다를 수는 없다.
내용을 많이 바꾸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전면개정판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고 한다.
물론 용어의 기원이 그렇지 요새는 오프셋 인쇄를 하기 때문에 정확히 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 오프셋 인쇄
원판에 잉크를 직접 묻혀서 종이에 인쇄하지 않고 중간에 고무 재질 등의 롤러(또는 블랭킷)을 이용해서 종이에 잉크를 전사하는 방식이다. 최근의 대량 인쇄는 대부분 이 오프셋 인쇄 방식을 사용한다고 한다. ctp 판이라고 하는 원판을 제작해야 인쇄가 가능하므로 소량 생산을 하는 경우 단가가 비싸지만 대량인 경우 단가가 분산되어 저렴하다. 이것 말고는 디지털 인쇄로 가정용이나 사무용과 같은 잉크젯, 레이저 방식과 같은 인쇄 방식이 있다. 인쇄 품질은 오프셋 인쇄가 한참 앞선다고 하며 보통 MCYK(마젠타, 시안, 옐로우, 키_검정을 뜻함) 4종류의 잉크를 사용한다고 한다. 검정을 B가 아닌 K로 부르는 건 색 별로 별도 인쇄를 하고 중간중간에 인쇄 위치를 보정하는데 검정색 판을 기준점으로 잡기 때문에 Key Plate라고 부르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오프셋 인쇄를 최근까지도 ctp 판이 아닌 석판으로 많이들 사용했다고 한다.
기술적 복제 덕분에 우리는 전통적 아우라를 청산했다.
감상자는 더 이상 수동적으로 작품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창조자가 되어 작품을 작가의 의도와 독립된 시선으로 즐기는 시대가 되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취향을 감안하여 새로운 작품을 직접 만들어 감상할 수도 있다. 작가와 감상자의 경계가 점점 무너지고 있다.
진득하게 추구할 수 있는 뚝심만 있다면 누구나 부담스럽지 않은 비용으로 책을 출판할 수 있는 세상이다.
다만 이러한 시도를 하는 사람들끼리를 소개해주는 수단이 아직 많이 않아보인다.
하지만 유투브라는 플랫폼과 저렴한 고성능 스마트폰 카메라가 컨텐츠를 사회 곳곳에 뿌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장르가 생겨날 여지가 있다.
유명 배우를 기용한 작품이 인기를 끄는 현상, 브랜드 가치를 통한 마케팅등 실체적 아우라에 기반한 문화는 조만간 주류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를 대체하기 위해 가상캐릭터를 기용한 장르들이 늘어나고 있다. 기상 캐스터도 점차 이렇게 대체되려 하고 있다.
여기에서 요구되는 것은 아무래도 능동적으로 감상하는 자세와 함께 내 취향을 정확히 잘 알고 있는 능력일 것이다. 각자는 각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하고 싶은지를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일상 탈출을 위한 다른 분야에 몰입 외에 영화처럼 몰입이 일상인 상황에서 가끔은 분산을 할 수 있는 취미를 가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캠핑하면서 불멍 떄리는 걸 사람들이 왜 좋아하나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 거기에 끌리는 사람이 있을 법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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