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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 - 에두아르드 한슬리크


18/12/06

* 과거에 남겼던 기록을 재정렬하는 중이다. 대부분 잊고 있던 내용이라서 새롭다. 그 와중에 지금 도움받을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만났다.

독서 예정 리스트에는 없던 책이었다. 종각 영풍문고를 배회하다가 우연히 철학 코너에서 제목이 눈에 띄었다. 검색해보니 19세기 오스트리아 출신 음악 평론가였고 내용을 대략 훑다가 감정이 음악을 이루는 주 요소가 아니라는 주장에서 흥미로울 것 같아 구입했다. 게다가 값도 굉장히 싸서 만족스러웠다.

나는 예술 장르 중에서 기악을 제일 좋아한다. 오래전부터 들어왔기 때문에 익숙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대부분 가사가 없기에 멜로디에 나만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어서 즐기기 좋다.
특히 말로 설명하기에는 굉장히 모호한 관념이 기악에는 잘 담긴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문학이나 미술과 달리 형태가 없거나 또는 실체를 담는 매개체가 물질이 아니라는 특징이 있다. 시간예술이라는 말에 맞게 시점별로 존재하기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음악은 다른 예술과는 달리 좀 더 특별한 형태로 존재한다. 자연히 더욱 더 모호하며 어디서 아름다움을 느끼는지도 사람마다 내용이 다르다.
같은 작품이더라도 혹자는 선명한 음질에, 또는 엄격한 박자감에, 또는 외성과 내성의 밸런스에 집중하고 상상하는 방식도 제각각 다르다. 하지만 유명하다고 하는 작품들은 초반에 들으면 본능적으로 좋다고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니 어쩌면 사회적 강요에 의해 그렇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주류 음악에 담긴 좀체 느끼기 힘든 배경적 규칙이 있어서 여기에 맞는 건 대부분의 사람이 좋게 느끼는 걸 수도 있다. 이 궁금증을 오래 가지고 있었다.
음악을 듣고 느끼는 아름다움의 근원은 어디인가.
이 내용을 책에서는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반가움을 느꼈고 소중하게 읽었다.

작가는 음악의 아름다움의 근원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먼저 형식에서 음악의 아름다움의 근원을 찾으려는 시도에 대해 그는 비판적인 입장이다. 아름다움은 그 피상물이 아름답기 때문이지 형식은 그냥 보조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그 음악을 듣고 보니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것이지, 애초부터 아름다워야지 라고 기획하고 만들 수는 없다.
그리고 그는 감상의 기준을 환상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감각 / 감정 / 환상 순으로 고차원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감각은 직접적으로 음을 듣는 단계 / 감정은 그 감각을 통해 얻는 즐거움, 두려움, 분노, 슬픔 등의 1차적 감정 그리고 환상은 이를 통해 얻는 우리의 단순한 직감이 아닌 지성을 통한 직감이다.
음악을 듣고, 감각기관을 통해 음을 받아들여 직관적 감정을 느낀 후, 이를 지성을 통해 재해석한 결과물을 통해 음악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미학계에서 음악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1세대 인물이다. 그전의 음악적 미학은 예술의 전반적인 테에 묶여 평가받아 타 예술 대비 음악이 갖는 특성이 굉장히 강함에도(직접적 표현이 사실상 불가능) 이를 섬세히 고려한 사람이 없던 터였다. 그 당시 음악의 미학에 관한 이론이 많이 나왔을 때지만, 전문 음악 비평가인 그의 저서화 깊이면에서 비할 수 없었던 까닭은 대다수 미학자들이 철학자 또는 문학가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 적 부터 음악적 교육을 엄하게 받고, 작곡하여 비평해보는 경험을 굉장히 많이 갖고 있었다.
한슬리크는 브람스와 개인적 친분이 컸다고 한다. 본인은 슈만의 음악을 자신의 미학적 이상에 가장 적합한 작곡가로 생각했는데, 브람스가 이 슈만의 계보를 잇는 작곡가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배경도 책을 읽으면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이 쓰여진 18세기 후반에는 고전-낭만주의 미학 기조가 등장했는데 음악을 자율적인 예술 작품으로 감상하려는 시도였다고 한다. 그 전까지 종교적 목적이나 행사 등 의례의 용도로만 대하던 음악을 여흥의 용도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기분 전환용으로 음악감상하는 것이 대부분인 요즘 사회의 통념이 막 싹트기 시작한, 말하자면 원시 시기였던 셈이다.
18세기 이전에는 음약의 형식이라 함은 가사의 형식을 온전히 따르고 있어서, 음악의 형식은 가사가 되는 시의 형식으로 받아들여졌다. (또는 그 이후에 가사가 없는 음악의 경우 춤의 형식) 왜냐면 그당시 음악은 노래나 춤의 반주 역할만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악 음악이 발전되면서 장르가 세분화되고, 표현법이 생겨나면서 기악 음악만으로 감동받는 현상이 일어났다. ‘성악이 우선이고, 성악만이 어떤 정신적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본질적 의미의 음악’이라는 생각이 버려지기 시작한 시기이다.
형식이 곧 내용이라고 보는 한슬리크의 미학은 기악 음악의 해방을 토대로 하고 있다. (형식이라고 표현하여 이해하지 못했는데, 음악 자체의 형상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이러한 배경을 보고서 그의 주장을 보면 그가 왜 표제음악, 교향시를 반대했는지, 감상할 적에 작곡 배경을 의식하지 말아야한다고 했는지 이해가 간다. 그는 이러한 것들을 음악이 갖고 있는 표현 가능성을 불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나'의 감정을 담은 곡을 통해 공감대를 이끌어내겠다'는 생각으로 감정을 중심으로 하는 작곡을 언젠가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작가에 따르면 음악은 감정을 주재료로 하지 않고 엄격한 형식을 통해서 청자에게 부수적인 감동을 전달한다고 하니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나의 접근법은 옳지 못한 것이 된다.
작가는 대신 형식의 창조성에 그 답이 있다고 말한다.
주 요소는 형식. 그리고 여기에 아마도 덧붙일 수 있는 것이 작곡 당시의 작가의 심정, 감정 등이라고 말하고 있다. 공감이 갈 듯 말 듯 하다. 이 주장은 독립적 장르로서의 기악곡이 막 태동하기 시작한 극 초기시절의 주장이므로 그 이후로 이어진 발전 흐름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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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6
음악은 고통, 기쁨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특정한 감정이란 구체적 표상과 개념에서 분리될 수 없는데, 음악은 개념을 형상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p.48
(이에 반해) 시와 조형 예술은 일차적으로는 구체적 어떤 것을 표현한다.

p.51
모든 내림 가장조가 꿈꾸는 듯한 분위기를 표현하지는 않는다.

p.62
음화(tonmalerei)와 관련 음악은 자신의 영역 밖에 있는 현상 자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현상을 통해 촉발되는 마음속 감정을 그린다라는 주장이 있다. (작가는 반대함)

p.77
음악 작품의 아름다움이란, 매력 넘치는 소리들의 의미있는 연관, 그 연관의 조화와 대립, 이탈과 도달, 상승과 소멸 등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적 직관 앞에 자유로운 형식으로 나타나 미적 만족을 준다.

p.78
이러한 음재료로 음악적 이념(musikalische idee) 이 자체로 독립적 아름다움이자 스스로 목적이 되는 것이지, 결코 감정 사고를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다.

p.83
선율이나 화성의 친화성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느끼며, 만약 모순되는 조합이 있는 경우 우리 귀는 이를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p.84
모든 예술의 목표는 예술가의 환상 속에 생동하게 된 이념을 외적으로 현상화하는 것이다. 특정한 격정을 음악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선율을 만들어내는 것이아말로 앞으로 이행될 작곡가의 참조 작업을 향한 출발점이다.

p.97
‘예술적 특수성과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비교하여 연관짓는 일은 예술사적인 연구이지 결코 순수 미학적인 과정은 아니다.’
-> 배경은 배경일 뿐 예술 자체의 미학적 관점에 있어서는 그다지 연관되는, 영향 미치는 요소가 아니라고 작가는 주장하는데 동의한다.
Op. 23 No. 1 in G minor를 한참 듣던 시절이 있었다. 콘라드 왈렌로드라는 영웅 서사시를 보고서 쇼팽이 영감을 받아 이걸 작곡했다는 기록을 보고는 가득 기대한 채로 이 교향시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 전혀 접점을 찾지 못했다. 최소한 나는 작품 자체를 주관화해서 즐기는 방식이 더 잘 맞는 듯하다. 작가가 작품을 대하는 것과 감상자가 작품을 대하는 방식은 그다지 관련이 없다라는 걸 이 경험으로 깨달았다.

p.100
‘음 예술의 물리적 부분을 연구하는 데 수학이 없어서는 안 될 실마리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완성된 음악 작품에서 그 의미가 과대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작품이 훌륭하든 나쁘든 간에, 음악 작품에서 수학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환상의 창조가 계산문제는 아닌 것이다.’
-> 최근에 작곡을 공부하는 친구와 교류하면서 그리고 피아노 레슨을 다시 받으면서 곡을 깊게 들여다 보았는데 그동안에는 알 수 없었던 작품 속 조, 악상, 음들의 전개 규칙(1도로 시작하고 3도, 6도는 여운을 주는 느낌을 표현하며 마지막은 다시 1도로 마무리 되는 공통적인 규칙 등)들을 볼 수 있었다. 즉흥적인 요소인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엄청나게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다만 작가의 말 처럼 이걸 감상할 때 의도적으로 의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는 작곡가의 영역이라고 생각해야겠다.

p.115
‘감정이 직접적으로 음으로 분출되는 것이 허용되는 행위는 음악 작품의 창조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음악 작품의 재생, 연주에서 일어난다. 철학적 개념으로 볼 때는 작곡된 작품이, 연주를 고려하지 않고도, 완성된 하나의 예술 작품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음악은 작곡과 연주로 구분되어있음을 잊게 하지는 않는다.‘
-> 내가 가사 있는 음악을 싫어하는 이유는 자기의 사연도 아닌걸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척 하는 모습에 어색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클래식의 경우 연주로서 작품을 재생산하는 순간 감정이 발현되므로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
다만 창작과 연주가 동시에 일어날 때 심적 상태가 가장 직접적으로 표출될 것으로 생각햇는데, 이 주장과 겹쳐서 생각해보니 본인이 작곡했다고 해서 더 감정적으로 와닿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창작하는 영역과 이를 소리로 실현하는 것은 엄격히 구분할 필요가 있겠다.

p.117
구체하지 않을 지라도 어떤 감정을 느끼가 하는 데 있어 시와 그림이 들이는 시간, 노력에 비해 음악은 비교적 빠른 시간에 도달하게 만든다.
-> 불확실성에서 오는 극적 효과로 봐야 할까

p.119
‘음악은 무형의 재료 떄문에 가장 정신적이며, 대상 없는 형식의 유희로 가장 감각적인 예술이다. 음악은 이 같은 두 가지 대립된 측면이 통일된 것이다.
-> 117에 대한 대답일 수 있다. 음악은 두가지 대립된 측면이 통일된 것이다.

p.159
음 예술과 자연의 관계. 리듬은 자연에 이미 존재 했다. 이걸 발견한 시점을 음악의 발견 시점으로 정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화성이 발견되고 나서 이 때 비로소 생겨났다고 본다. (화성은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걸로 본다.) 자연의 음과 예술로서의 음악은 구분되어야 한다. 피상물을 통해 음악을 적절히 작곡한 경우 미학적으로 표상과 음들의 연결은 별개로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 공감한다.

p.167
음악을 위해 자연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음계, 박자는 자연계에서 온 게 아니다.

p.178
음악의 내용에 대하여. 내용과 대상을 혼동하면 안 된다. 내용이 있을 지언정, 음악에 명확한 대상은 없다.

p.190
음악의 내용을 냉정히 부정함으로써만 우리는 음악의 정신적 내포를 구원할 수 있다. 왜냐면 사람들이 내용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개 불특정한 감정을 두고 한 경우인데, 이것으로는 음악의 어떠한 정신적 의미도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p.206
작곡은 본질적으로 형식적이며, 객관적인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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