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23
북카페에 어떤 책이 있나 훑던 중 분홍색 표지가 멀리 눈에 보였다. 색만 보고서 가벼운 에세이인가 싶어 제목을 읽어보니 의외로 남한산성이었다.
펼쳐서 내용을 보던 중 한강 나루터의 노인을 판서가 살해하는 장면과 그 딸을 데려가 키우는 장면을 보고서 언젠가 잠깐 스치듯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더 자세히 읽고 싶어서 명부에 이름을 적고 가져와 읽어보았다.
조선 인조대에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멸망당하는 과정에서 시간 간격을 두고 정묘호란 - 병자호란을 겪었다고 역사서는 전한다. 당시의 사료를 참고하여 소설가 김훈씨가 상상력을 더해 각색하여 소설화했다.
언젠가 예쁜 친구와 잠실호수공원을 걷던 날 롯데월드쪽에서 어떤 덩치 큰 뜬금없는 비석을 만난 것을 떠올렸다. 그 때 기억을 이번 소설과 이어보고서야 그때 그 비석이 있는 자리가 70년대까지 삼전도가 있는 자리였고, 몽골어, 만주어 그리고 한문으로 병기된 비석 내용이 병자호란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는걸 떠올렸다. 비석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 또는 삼전도비이다. 청의 세력이 약해지던 구한말 고종 황제의 명으로 강바닥에 버려졌다가 다시 일제에 의해 복원되었고, 다시 50년대에 묻혔다가 60년대에 홍수로 인해 다시 드러났다고 한다. 그 이후로 인근의 모처에 있던 걸 과거의 굴욕에서 교훈을 얻자는 전두환의 주장으로 복원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고증을 통해 실제 청태종이 앉았던 자리를 확인하여 최대한 그곳과 가까운 쪽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청의 조선 침입을 시작으로 결국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에게 무릎을 꿇는 것까지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짓밟히고 희생당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매우 안타까웠다. 또한 명분에 목숨걸고 글과 말로만 자잘자잘한 것들에 대해서만 골몰하는 지배층의 모습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그들의 행동과 모습들이 실제로 성 안에 갇혀 지내는 모습과 일치해서 더 복합적으로 이 감정을 느낀게 아닌가 한다. 소설의 머릿말에 나와있는 작가의 글에서도 이에 대한 작가의 취지가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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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말
(중략)
옛터가 먼 병자년의 겨울을 흔들어 깨워, 나는 세계악에 짓밟히는 내 약소한 조국의 운명 앞에 무참하였다.
그 갇힌 성 안에서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엉켜 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살아 있는 동안의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 내지 못할진대, 땅 위로 뻗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리.
신생의 길은 죽음 속으로 뻗어 있었다. 임금은 서문으로 나와서 삼전도에서 투항했다. 길은 땅 위로 뻗어 있으므로 나는 삼전도로 가는 임금의 발걸음을 연민하지 않는다.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
성 아래로 강물이 흘러와 성은 세계에 닿아 있었고, 모든 봄들은 새로웠다.
슬픔이 나를 옥죄는 동안, 서둘러 작은 이야기를 지어서 내 조국의 성에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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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감
소설을 통해 자세히 알게 된 내막에서, 소설을 읽고 난 후 추가로 알고 싶은 마음에 들어 알아본 병자호란의 원인과 전개 과정에서 그리고 현재에서도 흔히 보이는 힘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세계 곳곳의 마찰을 목도하며 역사는 항상 반복되고 있음을 다시금 상기한다. 이는 곧 멀지 않은 미래에 충분히 비슷한 사례를 직접 목격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뜻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비교적 평안하게 지내온 시대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이 기간이 유지되는 동안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힘 간의 균형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염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인터넷을 통해 확인한 자료에서는 실제 전황은 소설과 달리 남한산성에서 청군과의 전투에서 상당한 성과도 있었고, 남한산성에 있던 군대는 조선의 최정예군으로 사기도 높았으며 장비들도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뒤에 모두 말끔히 정비되어 전투준비태세가 완벽했다고 한다. 다만 강화도가 함락되고 왕비 등이 포로로 잡히면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추가 사료를 통해서 직접 확인해보려고 한다.
구성에 대하여
문학 뿐 만 아니라 창조물을 담는 빈 도화지는 무척 넓다. 그 많은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는 배경지식이던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운 허구의 산물이던 수많은 것들이 빼곡히 흰 부분을 메꿔야 한다. 동시에 이 조각들은 서로간 합이 잘 맞아 어색하지 않아야 한다. 이게 적절히 되어있지 않다면 내용들은 스스로 떨어져 나가거나 독자는 거부감을 느끼고 결국 작품을 잃는다. 이번 작품은 대부분의 면적이 작가가 쌓아올린 역사적 사료 지식으로 메꾸어져 있다. 이는 창조의 영역으로 면적을 메꿔낸 만큼 존경스러운 작업이라고 느낀다. 뿐 만 아니라 그들을 잇는 표현법과 단단한 필체에서 굉장히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소설을 통해 생각해본 것들에 관하여
삶에 철학이 미치는 복합적인 영향들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는 구성원 개인 하나하나가 자기 주도적으로 끊임 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삶의 방향과 방식을 완성하여 이를 추구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극히 일부만이 이러한 생각에까지 닿아 자주적인 삶을 이어 나갈 뿐 대다수는 일련의 사연으로 인해 그렇게 하지 못한다. 국가를 관리하는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대다수를 위해 그들이 바람직한 방향(주로 지배층의 관점에서)으로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끔 할 필요를 느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성리학 등이 이러한 역할을 한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덕분에 각자는 공통적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었고 사회는 안정되었지만, 지배층의 안위 위주로 꾸려진 사회로 인해 하층의 수탈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게 만성화되면서 탁상공론이 점차 커졌다.
성을 거두어 잠구고 사신과의 서신 왕래하는 과정에서 묘당과 임금이 골몰하는 주제들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특히 '네가 사특한 입질과 기름진 붓질로 몽롱한 문장을 지어서 나를 속이려 하니 …' 라는 서신에서 보이는 청의 직설적인 화법과 대비되어 더 크게 느껴진다.
등장하는 인물의 모습 : 정명수
변방으로 공권력이 적절히 닿지 못하는 고장에서 자란 그는 노비의 신분이었다. 중앙 정부로부터 사실상 방치되어 있는 동네에서 현감 등의 횡포 속에서 그는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고 심지어 부모가 그 상황에서 왜 자신을 낳았는지 원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누이가 죽던 날 오히려 더이상 추위와 배고픔을 느끼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편안함을 느꼈고, 부모의 죽음으로 인해 혈육이 모두 끊기는 상황에서도 짐을 벗어던진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 그가 후에 조국을 등지고 청의 앞잡이가 되어 오히려 고향 근처를 지날때 오랑캐의 선봉장에게 청하여 자신의 고향을 짓밟자고 청하는 것은 사연으로 판단하건대 납득될 정도였다.
구성원간 이성적인 판단과 원만한 교류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경제적, 심리적인 여유가 필요하다. 배고픔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사회적 질서나 인륜적 도리는 사치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는 비록 법적으로 신분제가 존재하지 않는다지만 경제적 불균형으로 절박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절박한 상황에 몰린 결과가 국가 구성원에게 어떻게 돌아오는지 굉장히 현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지금 우리의 상황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과가 다 표현되어 있어 그가 품는 성향이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기억에 남는 문장
문장으로 발신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임금의 목소리가 낮고 멀어서 상궁들은 허리를 숙여서 임금의 목소리를 들었다.
정명수는 칸의 사신으로 오는 용골대를 받들어 몇 차례 조선을 다녀갔다. 정명수는 칸의 위엄, 용모, 인품을 자신의 말로 조선 조정에 옮겼다. 조선 조정을 정명수의 입을 통해 칸의 표정을 더듬었다.
기타
소설의 구성은 다음과 같이 짧은 단어들로 묶여 있었는데, 가만히 두고 읽어보면 흐름이 단어들 하나 하나로 대표되는 모습이 보인다.
눈보라 - 언 강 - 푸른 연기 - 뱃사공 - 대장장이 - 겨울비 - 봉우리 - 말먹이 풀 - 초가지붕 - 계집아이 - 똥 - 바늘 - 머리 하나 - 웃으면서 곡하기 - 돌멩이 - 사다리 - 밴댕이젓 - 소문 - 길 - 말먼지 - 망월봉 - 돼지기름 - 격서 - 온조의 나라 - 쇠고기 - 붉은 눈 - 설날 - 냉이 - 물비늘 - 이 잡기 - 답서 - 문장가 - 역적 - 빛가루 - 홍이포 - 반란 - 출성 - 두 신하 - 흙냄새 - 성 안의 봄
소개받은 서적
후대에 정약용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글을 지었다고 소개받았다. 시간을 들여 읽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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