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02
근 2년 동안은 삶을 주제로 여러가지 방향으로 고민해보는 중이다. 여기에는 목적, 과정, 노년 그리고 마무리 등 다양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그 중에서 죽음은 시지프스의 신화 서두에서도 말하듯 중요도가 굉장히 높다. 어쩌면 제일 중요한 것일수도 있다. 이걸 먼저 고민해두지 않은 까닭에 방향을 잃고 안타깝게도 소멸해버리는 사람들이 현세에는 너무 많다고 느낀다.
죽음에 대해서 물어보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막연한 공포감을 갖고 있었다. 이는 질문에 답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내 또래라서 스스로와 죽음에 대해 막연히 당장 관계하지 않는 관념이라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진지하게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사회에서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쉬쉬하려는 분위기이다. 워낙 자살도 우울증도 많은 세상이니 말이다. 이런 환경에서 가장 흔하게 죽음을 마주하는 때는 중병의 말기나 갑작스런 자살 등 극단적인 상황이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죽음 자체보다는 연쇄적으로 따라오는 속성들_고통, 절규, 상실_ 의 부정적인 이미지의 영향을 받아 우리는 죽음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나는 삶을 완성짓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로 죽음을 꼽는다. 머지 않은 시일에 마무리를 맞이하게 되므로 그 때까지 남은 시간을 헤아려서 유한하게 인식하고 잘 활용해내어 종국에는 품어왔던 결말을 꼭 이뤄야겠다는 동기부여도 받는다.
이 정의를 세우는 데에는 '생이 완결되는 시점에 서둘러 도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세네카의 말에 큰 도움을 받았다. 나는 그가 말한 노년에 빨리 다다르고 싶다. 이는 시점적 정의가 아닌 충만성이라는 상태적 정의에 관한 내용이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 없이 갑자기 강제로 마무리되어 버리는 까닭에 엄청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완성형에 닿지 못한 채 조급하게 삶이 마무리되는 사례를 주변에서 너무도 많이 본다.
나처럼 위를 바라보며 오르막을 오르는 상황에서 정의하는 삶 말고 정상에 거의 다다른 상태에서 그간 밟아온 길을 내려다 보며 말하는 정의가 궁금해서 파스칼 브뤼크네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라는 책을 소개받고 서점에 들렀다. 이 책을 소개했던 기사는 이어령 선생을 인터뷰한 책을 함께 소개하고 있었다. 마침 그 책이 내가 사려던 책 근처에 진열되어 있길래 같이 사서 먼저 보게 되었다.
이어령 선생에 관해서는 문화부 초대 장관을 지냈다는 것 이외에는 아는 내용이 없었다. 하지만 인터뷰 내용을 읽어보면서 굉장히 짙은 동질감을 느꼈다. 생각의 방향이 되게 비슷했다고 느꼈는데, 다음의 부분에서 특히 그랬다.
- 모든 사물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을 갖는 자세. 그리고 이게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는 자세.
- 보통의 관념에 대해 통용되는 정의에 상관 없이 본인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정의를 충분한 고찰을 통해 내리는 모습. 그리고 그 정의가 상당히 타당하게 느껴졌던 모습.
-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모습. 자기합리화를 하지 않는 자세.
- 삶을 마무리하는 중요한 과정으로서 죽음을 인식하여 당당히 이것을 맞이하려고 하는 자세
- 자유에 대한 정의 (본능에 따르는 것을 지양하고 내가 해야 할 것을 인식하고 무던히 추구하여 종국에 성취해내는 자세)
- 다원주의사상의 추구
이러한 짙은 공감대 덕분에 세상을 자연계 - 기호계 - 법계 세가지 범주로 나누어 인식하는 모습 등 내가 처음 접하는 그의 관념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갔다.
나와 사상을 공유하는 앞서 걸어갔던 사람의 족적을 통해 지금 시점에서 내가 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힌트를 얻은 느낌이다.
이어서 이 책을 통해 소개받은 미셀 푸코의 감옥의 역사를 읽을 예정이다. (다원주의를 보여준다고 한다.) 또한 전에 시도했다가 실패한 칸트의 3부작 순수, 실천, 판단 이성비판도 해가 넘어가기 전에 다시 도전해보고 싶다.
*릴레이 식으로 책 속에서 책을 추천받아 읽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래서인지 책 마다 말하는 내용이 비슷하다. 담론의 질서, 주체의 해석학을 이미 본 상태로 이 책을 보면서 동질감을 느꼈는데 다시 푸코의 책을 추천받은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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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짜 살고자 한다면 죽음을 다시 우리 곁으로 불러와야 한다. 죽음이 우리 일상 속에 있기에 우리는 살아있는것이다. 죽음의 흔적을 없애면 생명의 감각도 희미해진다.
물고기가 바다를 나오면 죽는다. 그 순간 자기가 살던 바다를 본다. 내가 사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상태. 그게 죽음이다.
진실의 반대는 망각이다. 우리가 잊고 있던 것 속에 진실이 있다. 경계할 것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다. 덮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것. 은폐가 곧 거짓이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다. 소크라테스는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지혜라고 했다. 그리스에 말하는 운명론이란 있는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 모아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자연계, 기호계, 법계 크게 세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이 세가지는 전혀 다른 세계다. 이걸 이해해야 우리는 혼돈 없이 세계를 보고 분쟁 없이 대화할 수 있다.
칸트는 이 각각을 순수이성비판, 판단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야기했다.
살아있는 것은 물결을 타고 흘러가지 않고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가 이 문명사회에서 그냥 떠밀려갈 것인지 아니면 힘들어도 역류하면서 가고자 하는 물줄기를 찾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다만 우리가 죽은 물고기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보통 사람은 비참한 자기 얼굴을 잘 안 보려고 한다. 흐린 거을이나 깨진 거울로 본다. 직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만이 일그러진 자기 얼굴을 똑바로 본다.
선악은 행위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또 다른 것이다. 참을 다루는 진도 행위를 다루는 선도 아니다. 제 각자 미를 느끼고 판단하는 것은 표현의 영역이다.
생각을 다루는 인지론, 실천을 다루는 행위론, 표현을 다루는 판단론, 인간으로 풍부하게 누리고 살아가려면 이 세가지 영역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자유의지가 있어야 한다. 길을 일탈해서 길 잃을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게 선이든 악이든 일단 나의 행위가 있어야 하느 거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인간은 신에 가까운 자유의지를 갖게 된 것이다. 신이 그것을 허락한 거야. 신은 자유의지를 가져도 실수를 안 하는데 인간은 실수할 수 있다. 악도 선도 행한다.
창조는 카오스에서 생긴다. 질서에서는 생기지 않는다. 질서는 이미 죽은 거다.
인간은 지혜를 가진 죽는 자이다. 다른 생명체는 죽어도 자기 죽음이 갖는 의미를 모른다. 신은 반면 죽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죽는 것의 의미를 아는 동물이다.
모든 생명 가치는 교환인데, 핵심 교환은 세가지다. 피의 교환, 언어 교환, 돈의 교환. 돈이 없으면 시장이 성립이 안 되고, 피가 없으면 어린아이가 생길 수 없고, 언어가 없으면 사상이나 정의, 선, 가치가 다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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