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27
회사 북카페를 뒤적이다가 제목이 끌려서 집었습니다.
일본사회에서 보이는 주요 문제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외면하는 현실을 누군가는 말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글을 적는다고 작가는 자신을 소개하고 있구요.
책의 말미에서는 일부 이슈에 대한 해결책을 나름 제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사회현상을 비추고 있어요.
그래서 나름대로 여러갈래의 개선 방향을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일본은 앞으로 우리기 겪을 법한 일들을 미리 나서서 겪고 결과를 비춰주는 타임머신 역할을 많이 해주는 것으로 느낍니다.
여기에는 정권의 세습화나, 경제적 해법으로서 방조법을 택한 모습, 고령화 사회, 성장 정체 사회, 부의 분배가 되지 않는 사회, 내부 의사소통이 부재한 사회, 부동산 문제 등등이 있겠지요.
특히 개인주의 사회로 한참 전 나아간 모습에서 우리나라 사회의 미래상이 어떨지를 짐작해보았어요.
전에 일본 여행을 갔을때 우리가 보통 오덕후라고 깎아내려 표현하는 부류의 사람을 오락실에서 마주한 적이 있습니다. DDR 같은 게임기에서 엄청 열심히 춤을 추고 있었는데 눈에 띄게 즐기고 있었기에 주변에는 수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그를 구경하고 있었어요. 되게 우스꽝스러워 보여서 한참을 비웃고 있었는데 문득 자기가 좋아하는 걸 주변 눈치 보지 않고 정성을 다 해서 추구하는 모습에 뭔가 감동을 받았던 것 같아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니 처음에는 냉소로 생각했던 군중의 웃음도 가만 다시 보니 응원과 칭찬이 잔뜩 담겨있었구요. 여행 내내 머릿속에서 그 장면이 맴돌기도 하고, 초반에 그사람을 비웃던 제 모습이 부끄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 밖에도 옷차림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맘대로 하고 다니고, 취미샵들도 엄청 전문화되어있는 모습에서 다원주의가 잘 무르익은 건강한 사회구나라는 생각에 부러움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집단주의로 인한 몸살을 많이 앓고 있다니 의외이기도 하면서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집단주의는 얼만큼 더 심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이 이어져서 머리가 복잡해지더군요.
평소에 회사에서나 교류하는 무리에서나 뭔가 고여있는 문화나 부조리를 나라도 좀 터봐야겠다 싶어서 몸통박치기를 많이 하고 다니는 편이었는데, 요새는 약아졌는지 점점 잦아들고 있었나봐요. 다시금 내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해볼 수 있었어요. 더 잊혀지기 전에 한번 실행할 만한 것들을 찾아봐야겠어요.
목차
1. 소비사회와 가족의 해체
2. 아버지의 몰락과 압도하는 어머니의 등장
3. 확대가족론
4. 격차사회의 실상
5. 학교교육의 한계
6. 불통을 넘어서는 소통 능력
7. 다음 세대와 연결하기
8. 안테나 감도를 높이기
9. 자아 찾기의 함정
10. 제자라는 삶의 방식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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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외부에서 내리는 우리에 대한 평가에 대해 그 차이를 단순히 자신의 경제 상태에 대한 평가로 여기지 않고 인간으로서 열등하다는 선고로 받아들여 그 말에 인격적인 상처를 입습니다.
무엇을 구매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사는 것, 그 소비 활동이 분수에 맞는지 여부에 대하서는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것이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성장을 하지 않고 유지중인 나라가 왜 끝이 아닌지 누군가 설명을 해주길 바라지만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성장 외의 다른 선택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은 지금의 미디어에서는 누구도 제기하지 않고,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여기까지는 제가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하는 대화를 주고 받으며, 서로 겨운 한숨을 돌리겠지요. 그런 풍경을 상상하면서 그때까지는 그 바람에 의지해서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모두가 느끼고 있는데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을 찾아서 쓰고 있기 때문에 입장이 다른 매체들에서 제게 집필을 의뢰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엇을 구매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사는 것, 그 소비 활동이 분수에 맞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것이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가족 해체는 필연적 귀결이었던 것입니다.
거품경제 이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소비 행위가 아니라 노동 행위로 보여 주는 것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무엇을 구매하는가 가 아니라 무엇을 생산하는가에 의해 정체성이 형성되었습니다.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의 유용성과 완성도, 독창성에 대해 다른 사람의 승인을 얻는 쪽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80년대의 소비문화는 그 규칙을 완전히 바꿔버렸습니다. 노동이 아니라 소비가 인간의 일차적인 사회 활동이 되었습니다.
짧은 근로 시간에 가장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근로 형태가 일하는 방법으로 가장 현병하다는 것입니다. 반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사용가치가 높은 제품을 만들어 내도 높은 수익이 따르지 않는 노동은 사회적으로 열등한 자리로 자리매김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런 일을 관이 맡기로 했기 때문에 지역공동체는 더이상 치안이나 소방, 공중위생 서비스를 스스로 책임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야간 순찰 등 틈이 있으면 그 시간에 일을 해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서비스를 사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지역공동체도 무너져갔습니다.
서로에게 폐를 끼치기 위한 시스템인 셈입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서로 폐를 끼치는 존재라는 인간 이해가 그 기본에 깔려 있습니다.
아이들 세계에 강한 동조 압력이 작용해 상당히 폭력적인 방법으로 균질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개성적인 무언가가 출현하며 그 아이는 금세 따돌림의 대상이 됩니다. 특출한 누군가가 나타나면 모두가 발목을 잡아당기지요.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니까요. 하루 세 번 밥을 먹고, 잠도 자야 합니다. 가끔은 목욕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과로하면 병이 나기도 하고, 여러가지 일로 힘들어지기도 하는 그런 신체적인 제약이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가난해도 품위 있게 사는 지혜를 현대인은 잃어버렸습니다. 분수를 안다는 것은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그 나름 삶의 질을 높일 궁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격차사회에서는 그런 삶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하위 계층으로 등급이 매겨지면 그 사상이 분하고 슬프고 절망스러워 필사적으로 계층 상승의 사다르를 기어오르려고 투쟁하거나 아니면 모두 포기하고 무기력하게 주저앉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규칙이 그렇기 때문입다.
분수를 안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분수를 안다는 것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공적인 자원 중 모두에게 똑같이 할당된 부분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 자신의 몫은 대체로 이 정도라는 전망이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분배받는 인간을 타인이 노력해서 거둔 성과에 무임승차한 사람 같은 부끄러운 존재로 바라봅니다. 이는 미국 공화당 지지자들의 생각입니다.
애국심 교육의 어리석음은 그 지점에 있습니다. 애국심의 기초는 자신과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동포들을 향한 무조건적인 공감과 애정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애국심을 교육하라고 외치는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같은 국민인 경우에도 자신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하지 않는 사람을 비국민 심지어 매국노라고 부르며 동포에서 쉽게 제외시키려고 합니다.
공교육이 태동한 곳은 프러시아였고, 이론을 정비한 곳은 프랑스였지만 제도로 정착시키는데 최초로 성공한 나라는 미국입니다.
학교교육은 공동체의 다음 세대를 짊어질 수 있는 성숙한 시민을 기르기 위한 것입니다.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다양한 교육기회가 제공되고 아이들마다 자신의 잠재력을 활짝 꽃피울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최대한 아이들 모두가 각각의 방식으로 천재로 인정받는 구조를 만들고 싶습니다.
진정한 의사소통 능력이란, 의사소통을 원만하게 진행하는 능력이 아니라 불화와 맞닥뜨렸을 때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은 보통은 하지 않는 것을 일부러 하기라는 모습에서 발동됩니다. 그렇기에 매뉴얼화가 불가능합니다. 상황마다 특수한 사정을 기초로 임기응변이나 즉흥적인 판단에 따라 자기의 책임 아래 기존에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코드를 뭉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문제는 우리 사회가 매뉴얼을 촘촘하게 만듦으로써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 적절하게 대응하기라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힘을 거세시킨다는 점입니다.
수업을 받으면 어떤 메리트가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머리에서 지우지 않는 한 사제 관계는 시작되지 않습니다.
앞서가는 사람을 뒤따라가려는 젊은이들은 이제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 높이 올라가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발상을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모두가 함께 살아남을 수 있는 걸 찾고 있습니다.
스승을 따르는 제자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틀려되 얼마든지 실패해도 됩니다. 이처럼 넓게 열려있는 패자성이 제자라는 포지션에 주어지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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