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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뤼시스 - 플라톤



22/03/25

전에 읽었던 플라톤 향연 책 반절 뒤에 뤼시스라는 별도의 편이 있었다. 독서를 통 못하고 있는데 다시 가볍게 시작해보고자 얇은 두꼐를 보고서 들고 다녔지만 결국 끝까지 골몰하여 읽지 못했다.

소크라테스의 어록답게 스무(억)고개 식의 대화로 이루어진 내용이다.

우정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길거리에서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구전되던 내용을 제자가 책으로 담았다는 점에서 동양의 철학서 (금강경이나 맹자, 논어 등등)과 형식이 비슷하다.

한 주제에 대해 이건 어때요? / 저건 어때요? / 아니 그렇다면 먼저거랑 이거는 서로 엇갈리는데요? / 아 그런데 이렇군요? / 이렇기도 하구요 / 그렇다면 이러이러하니 요렇게 결론내리는 건 어때요 라는 식으로 만약에 실제로 누군가가 제게 이런 식으로 물었다가는 분명 짜증을 냈을 법한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더군다나 아니지 아니한가 이런 식으로 글이 적혀 있는 바람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아 들고 놓고 들고를 반복하다가 딱 반정도까지만 읽고 후반부(우정에 관한 내용)은 읽지 못했다.
'우리는 이렇게 대화를 오래 했음에도 진짜 우정이 어떤거라는 걸 아직 알지 못해서 안타깝구나!' 라고 되어있는걸 보니 우정에 대한 마땅한 정의는 결론내지 못한 듯하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히포탈레스라는 사람이 뤼시스를 흠모(아마 짝사랑) 하여 찬가 등을 만들어 부르고 다니는 모양.

크테쉬포스가 이를 길 가던 소크라테스에게 일러바침. 소크라테스는 히포탈레스에게 왜 가지지도 못하고 찬가만 하는지, 그렇게 한다면 오히려 상대방이 자만해져서 오히려 더 갖기 어려워지지 않겠느냐고 물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나를 좋아하게 할 수 있는지 히포탈레스가 소크라테스에게 문의.

그러자 데려오라고, 내가 이야기하는 방법을 직접 보라고 소크라테스가 제안.

잔치에서 소크라테스가 사람들과 대화하지 뤼시스가 관심을 갖고 합석. 쫄보 히포탈레스는 얼른 숨음.

소크라테스가 합석하는 뤼시스를 보면서 나이를 묻고는 참석자 중 누가 더 고귀한지 물음. (여기부터 이야기의 방향을 놓치기 시작함) 누가 더 정직한지 물음.

그러다가 뤼시스 지인이 자리를 비우게 되어 소크라테스와 뤼시스의 1:1대화 시작.

[소크라테스 -> 뤼시스]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하는가? -> 예

자기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라시는가? -> 예

노예와 같이 자유롭게 하고 싶은걸 하지 못하는 삶은 행복한가 ? -> 아니오

그렇다면 자기 부모님은 자네가 하고 싶은 걸 모두 허용하는가? -> 아니요. 많이 제한합니다.

행복하길 바라시는데 원하는 걸 금지한다고? 말 경주같은것도 안 시켜주시나? 그렇다면 이런건 누구에게 허용하시는가? -> 고용 마부한테만 허용하십니다.

그는 노예가 아닌가? -> 예

그럼 그거 말고는 자네 마음대로 행동하게 하는가? -> 아뇨

그럼 누가널 지배하나 -> 시종이요.

그도 노예 아닌가? -> 예. 게다가 집에서 어머니 곁에 있어도 전 자유롭게 못합니다.

왜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나?-> 나이가 어려서 아닐까요?

아닌 것 같다. 넌 지금 이미 마음대로 책도 읽고 해야 한다. 간섭받을 시기가 아니다. -> 그건 그렇다.

내 생각에는 나이가 아니라 지식의 모자람에 기인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당신이 지혜롭다고 부모님이 생각하신다면 모든 걸 자유롭도록 허락하실것이다.
남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지식을 소유한다면 누구나 우리를 신임할 것이다.
-> 공감합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언제나 친구여야 하는가? -> 예

도움을 못 주더라도? -> 도움을 주어야 친구지요

자네가 유식하고 유용하다면 친구가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유용한 사람이어야 높은 사실을 지닐 수 있다. 부모님은 너가 아직 유식한 자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교사를 붙여주셨을 것다.
-> 공감합니다.

여기까지 말하고서 히포탈레스를 슬쩍 보면서 이렇게 상대방을 스스로 낮추고 겸손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식으로 텔레파시 보내면서 찡긋함.

아까 잠깐 자리 비운 뤼시스 지인이 돌아옴. 그리고 다음 주제로 이야기 시작.

누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둘은 친구라고 할 수 있나? -> 예

둘 중 한 사람만 사랑해도? -> 그렇지 않겠습니까

한 편이 사랑을 못 받고 미워한다면? 우정이 없겠네? -> 흠 그렇겠군요.

그럼 다시 말하면 이 관계는 친구가 아니다? -> 그렇네요..

누구든지 사랑받지 못하는 친구에게는 친구가 될 수 없지? -> 네네 암요

결론은 내가 사랑하는 자가 나의 친구고, 사랑스러운 자입니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자는 적이 틀림없지만, 나를 싫어하는 자는 나의 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인 즉슨 사랑하는 자가 친구일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사랑받는자도 친구가 될 수 없고 양자가 다함께 친구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식이라면 오류가 발생한다.

여기까지만 간신히 엉덩이를 붙이고 읽었고 그 다음 구절부터는 읽어내지 못했다. 지금 막 확인한 서로 상충되는 오류들을 검증하고 바로잡아가는 과정이 적혀있었는데, 결국 마지막에 참석자들은 결론을 내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후감

소크라테스가 히포탈레스에게 소개한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낮추고 겸손하도록 하는 과정 자체는 공감가지 않았다. 다만 어떤 주제나 상태라도 조곤조곤 과정을 하나하나 짚어보는 시간을 갖는 건 필요해보였다.

친구의 정의를 세워가는 과정에서는 예전 수학 시간에 역 / 이 / 대우 등 명제에 대한 관계를 다시 상기해볼 수 있다. 명제가 참이면 대우도 참인 건 확실하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는 걸 배운 적이 있는데, 굉장히 분명한 듯 보이지만 일상생활에서 상술이나 감정이 섞인 상황에서는 이걸 명확히 보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맞이하곤 한다. 역시 마찬가지로 이럴 때에는 객관적으로 소크라테스처럼 삼단논법으로 검증을 해보면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 정도까지는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