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04
대학생 시절 한참 유행했던 책이다. 정의의 뜻에 대하여 주류 의견들을 소개하고 그 중 작가가 생각하는 현재 미국 사회에 필요한 정의를 말미에 소개한다.
트렌드 도서였기에 굳이 읽어야 하나 싶어서 그때는 읽지 않고 넘겼다. 하지만 지내고 있는 여건상 읽을 수 있는 책이 한정적이라서 이거라도 읽어야 했고 결과적으로는 유익한 만남이었다.
내용이 복잡하지 않지만 근무 환경 특성상 주말에 잠깐씩만 책 읽을 여력이 있는지라 간신히 1달이 지나서야 다 읽게 되었다.
책에서는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 / 엠마뉴엘 칸트의 자유주의 / 존 롤스의 평등주의 등을 소개해주고 말미에 공리주의는 정의를 원칙이 아닌 계산법으로 접근하고 인간 행위를 획일화 한다는 점에서 / 자유주의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정의, 도덕에 대한 기준점이 없다는 데서 오류가 있다고 분석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는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소개한다.
현재 미국에서 시민의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존중한다는 명분으로 신념을 모른척하고, 방해하지 않으며 공적 삶에서 그것을 가급적 언급하지 않는 식의 존중은 사실 회피이고 가짜 존중이라고 작가는 생각한다.
그는 정의로운 사회에는 강한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므로 사회는 시민들이 전체를 걱정하고 공동선에 헌신하는 태도를 키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가 도덕적 이견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상호 존중의 토대를 약화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더 강화시킬 수 있고 도전하고 경쟁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경청하면서 학습하면서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에 잠깐 이 책을(강의도 마찬가지) 더듬었을 때 공리주의를 소개하는 서두만 잠깐 접하고 멈췄기에 나는 마이클 샌델이 말하는 자유가 공리주의를 말하는 것으로 오해를 했다. 그래서 더욱 이 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번에는 시간을 두고 순서를 밟아 그의 소개를 계속 쫓아갈 수 있었고 덕분에 오해를 사지 않아도 되었다.
서두에서 공리주의 즈음을 지날 때에는 전과 같이 굉장한 거부감을 느꼈다. 대다수의 편의를 위해서 소수는 존재마저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집단주의적 주장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간 이어져 온 성장 위주 정책의 영향으로 우리는 이 관습을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곤 한다. 짜장면으로 통일이나 회식 거부자에 대한 불이익, 유행을 따르지 않는 사람의 배척 등. 하지만 이도 최근에는 점점 희미해져가는 추세이다.
칸트의 자유주의를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굉장한 반가움을 느꼈다. 내가 재작년에 만났던 모든 책들은 칸트의 영향을 받은 저자들의 의견이었고 하나같이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연중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그 책의 문장들을 통해 자유에 대한 정의를 그 기간동안 굳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후반부에서 존 롤스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사회적인 합의가 언급되는 부분에서는 갸우뚱했다. 정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미에서 작가가 이제까지 나온 모든 소개를 분석하고 결론으로 각자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을 전달해주었을 때야 비로소 사회적 합의나 공동선에 대해 공감할 수 있었다. 각자가 정언적으로 마음속에 품는 정의의 척도가 다를 수가 있다는 걸 잠깐 잊고 있었던 탓이었다.
후감
사람을 사귈 때 나는 그가 상대방을 존중하는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바라본다. 내가 지닌 것이나 품는 이상이 얼만큼인지와 구분하여 상대방이 지닌 것과 뜻을 인정해주고 들어주는 역할을 해내는 사람인지를 제일 먼저 확인하고서야 나는 마음을 연다. 나의 이야기를 남에게 하면서 공감을 기대하는 것은 똑같이 상대방의 것을 내가 귀기울여 듣고 이해를 노력하는 자세가 전제조건으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험상 속이 가득 찬 사람일수록 존중하는 능력을 단단히 갖추었었고 오히려 자신의 것이 아쉬운 경우에 상대방 우위를 갖고 싶은 마음에 남을 낮추거나 내 것만을 내세운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동시에 존중이라는 명분 하에 타인의 취향에 대한 평가를 속으로 묵혀버리기도 한다. 상대방이 나와 많이 다르다고 느끼면 외면하고 무시해버리기까지 한다. 상대방을 내가 속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행동이기도 하다. 이것은 저자가 책에서 소개한 칸트식 자유주의의 문제점이자 미국의 문제점과 같다. 남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을 갖게 된 것은 사회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였는데 특히 무례한 행동을 일삼거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주제를 피해가면서 궤변을 늘어놓는 등 정상적 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합의가 불가능한 상황이 나의 의지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내가 그들을 바꾸는 게 불가능하기도 하고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벗어버리면서 나만 올바르게 행동하고 떳떳하면 된다는 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책에서 소개된 주제를 접하면서 이러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지금이야 사람들을 기호로 여겨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쉽게 멀리하면 되지만 한 사회에 속해서 피할 수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상대방의 터무니없는 태도로 인해 협의가 답보 상태에 놓인 상황이라면 우선 합의가 무조건 나야 한다는 결론을 전제로 두고 거꾸로 거슬러 올라오면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경험상 내가 비논리적으로 그를 똑같이 괴롭혀야 하는 방식이 사실상 유일하다. 저번달에도 똑같은 일이 직장에서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의 마찰이나 나의 추해지는 모습이 나는 싫다. 그들도 고통스러워 한다. 하지만 필연적이다.
공동선에 대한 논의를 할 때에도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서로의 주장이 부딪히는 지점이 있을테고 특히나 주장에 흠이 많은 쪽은 점점 벼랑에 몰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늘어놓을 것이다. 우리 윗동네 사람들이나 정치권에서도 흔히 보인다.
하지만 그간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첫 마찰이 지저분하고 시끄럽지 이러한 마찰이 잦아지면 서로가 너무 극단으로 가지 않고 힘조절을 하면서 점차 건전한 방식으로 변한다. 곧 원만한 사회적 합의 체제로 안정된다. 다시 먼 훗날 이러한 원만한 합의가 생겨난 내막을 망각하는 시대가 되면 다시 거친 협의 방식이 등장할테지만 이 역시도 곧 다시 원만한 과정으로 돌아올 것이라는걸 우리는 안다. 이러한 과정이 생기려면 저자의 말대로 사회는 각 계층간 의사소통이 원할해야 한다.
사회는 건전해지려면 당장 치고 받고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
최근의 고민에 대한 해결책은 이번 책 덕분에 짧고 명확하게 결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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