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09
날이 덜 추워진 덕에 퇴근하고서 집 근처에서 조깅을 하기 시작했다. 집 근처에는 뛸 곳이 마땅치 않아서 대체지를 찾다가 요새는 과천저수지 근방에서 뛰고 있다. 저번주 여느날처럼 뛰던 중 문득 낯이 익는 입구를 보았는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입구였다.
작년에 한 번 가본 적이 있는데 코로나로 인해 관람시간이 1시간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전시관을 반도 보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던 기억이 났다.
마침 관람시간 제한도 없어졌다고 해서 대통령선거일을 이용해서 친구와 함께 다녀오기로 했다.
전에 방문할 때는 지하철을 이용했다. 역에서 미술관 까지 거리가 얼마인지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갔다가 40분을 걸어야 했던 기억이 있다.
찾아보니 미술관 앞에 주차장이 있다고 해서 이번에는 차로 다녀왔는데 굽은 산길로 꾸며진 진입로가 굉장히 아름다웠다.
'시대를 보는 눈' 전이 여전히 상설 전시로 진행중이고(작년에 시간이 모자라서 모두 관람하지 못했다), 특별전시로는 백남준씨의 작품과 함께 '대지의 시간'이라는 주제의 전시가 진행중이다.
1층부터 돌아볼 생각으로 입장했는데 둘러보니 한켠에 어린이 체험관이 있었다. 오랜만에 듣는 돌고래소리들에 이끌려 들어가보니 아이들이 체험에 열중하고 있었다.
직접 전시품에 실을 오려붙이거나 만져보는 식으로 직접 체험하는 것들이 많이 놓여있었고 거기에 집중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귀여웠다.
대조적으로 엄청 빠르게 지쳐가는 부모님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이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작품 중에 와우산에서 남쪽으로 서울을 바라보고 90년대 풍경을 그려둔 게 있었는데 지금의 서울 모습과 과거 모습을 비교해볼 수 있었다. 여의도도, 강남도, 관악산도 모두 담겨있었다.
그리고 나와서 1층의 특별전시부터 관람을 시작했다.
생태미술을 다루었다고 하는데 사실 의도를 정확히 모두 파악하지 못했다.
정규동씨의 OAA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바닥에 흰 색 검정색의 알맹이가 군데군데 쌓여 있었고 그 위에는 형광등처럼 보이는 얇고 긴 원통형 유리관들 안에 바닥의 알맹이들이 가득 답겨 있었다. 그리고 유리관들은 층층이 서로 엇갈려 쌓여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바닥에 쌓인 원료들이 근간이 되어 구조를 이룬다라고 이해했는데 취지를 읽어보니 '촘촘하게 연결되어 서로를 의지하는 기둥 구조로 조화, 균형, 존중과 배려에 관한 메시지를 담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 외에 정소영씨의 midnight zone이라는 작품은 심해층의 비디오 영상과 함께 이리저리 임의로 쌓여 있는 탄산 칼슘들을 어디는 네모난 아크릴 박스 안에, 몇몇은 바닥에 수북히 쌓아두고 있었다. 작가가 담는 미드나잇 존의 관념을 이렇게 표현한 건가 싶었다.
그리고 나와서 맨 위층으로 올라가 시대를 보는 눈 전시를 맨 처음 연대부터 보기 시작했다.
국립현대미술관들에서 작년여부터 근현대 미술을 조명하는 취지의 전시를 많이 보여주고 있다. 과천관에서는 특히 20세기 초 유화가 한국에 소개된 이후로 현대까지 국내 현대미술의 주류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전 스펙트럼에 거쳐 소개시켜주고 있다. 시간만 충분히 있다면 한 번에 주욱 훑어볼 수 있어서 좋다.
1.전통미술의 변화와 유화의 도입 (1900년대 초)
2.관전 미술과 새로운 표현의 출현 (1920 ~ 1940년대)
3.해방과 전후 미술 (1940 ~ 1950년대)
4.현대미술의 서막, 앵포르멜(1960년대)
5.미술 표현 양식의 다양한 실험들 (1960 ~1970년대)
6.1970년대 단색조 경향의 작품들 (1970년대)
7.새로운 형상 회화의 등장, 한국 극사실회화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8.1980년대 이후 한국화 (1980년대 이후)
9.민중미술 (1980년대)
10.1980년대 다양한 소그룹 활동 (1980년대)
11.세계화의 시작 (1990년대 이후)
12.개념적 태도 (1990년대 이후)
13.비판적 현실인식 (1990년대 말)
14.일상과 대중문화 (2000년대 이후)
15.다원예술과 표현의 확장 (2000년대 중반 이후)
1900년대 주류 미술이었던 초상화, 병풍화와 함께 막 국내로 소개되기 시작했던 유화를 이용하여 작업한 작품들이 먼저 소개된다.
(고종어진, 병풍화)
고종 어진이 비단에 그려져 있었는데 마티에르가 있길래 비단을 짤 적에 해당 부분의 입체감을 미리 고려해서 패턴을 만들어둔 줄 알고 신박하다고 느꼈다가 나중에 다시 보니 모든 입체적인 요소들이 비단이 아니라 물감으로 만든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수채화로 그린 병풍은 거의 도트 프린터로 그린 것처럼 되게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자세하게 속을 들여다보면 작은 요소 하나하나들이 꼼꼼하게 그려져 있었다. 정성에 장인정신까지 전해졌다.
(김기창 화백 작품)
김기창 화백의 작품도 한 점 전시되어 있었는데, 역시 미남같은 자태로 뚜렷한 선을 통해 인물들을 표현하고 있었다.
(최근배 화백 - 농악)
병풍에 풍악놀이를 표현해둔 작품이 있었는데, 옷감이나 징의 표면을 그라데이션은 아니지만 균일하지 않게 채워넣은 모양새가 되게 멋지게 보였다.
(허건 화백 - 목포교외)
목포의 들녘을 수묵담채화로 그려둔 작품이 있었는데, 전에 석현 선생 작품에서 느꼈던 여유로움이 느껴져서 좋았다.
(김주경 화백 -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유화를 이용한 작품 중에는 유화 특유의 한 붓결 내의 여러 물감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용해서 한 붓길로 산등성이와 수풀을 표현해둔 모습이 되게 멋지게 느껴졌다.
해방전후 미술들은 공통적으로 되게 바탕이 붉고 어두운 느낌이었다. 사회적 배경을 반영한건가 싶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는 전에도 만났던 단색화 계열들을 만났다. 단색화들에서는 항상 클래식음악과 같은 인상을 받는다. 단순한 패턴 속 복잡한 실마리를 통해 내가 내용을 내가 꾸밀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듯하다.
현대미술에서는 그 전까지는 2 dimensional의 표현을 넘어선 입체적인 표현이나, 융합공학과 같이 이미 존재하거나 의미를 지닌 문자나 사물 관념 등을 활용해서 재창조적인 표현을 이뤄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같은 근본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현대 사회의 발달사별로 어떤 표현들을 이루어냈는지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개인적으로 방문해보았던 장소 중 내가 본능적으로 명당이라고 느끼는 곳이 두 군데 있었다. 천안의 현충원과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그곳이다. 청계산 깊숙히 품은 골짜기에 관악산과 과천시를 넓은 평지를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모습이 정말 엄청나게 멋진 곳이다. 마침 방문할 때마다 나의 시점도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이번 전시가 끝나고 다음 전시가 열릴 즈음에는 또 나는 어떤 모습일 지 기대된다.
'전시 관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원을 빚은, 권진규 @ 광주시립미술관 (0) | 2022.10.09 |
---|---|
국립광주박물관 관람 (0) | 2022.03.26 |
박수근 : 봄을 기다리는 나목 @ 덕수궁미술관 (0) | 2022.01.28 |
광주 동곡 미술관 방문 (0) | 2022.01.28 |
부천필 283회 정기연주회 - 흑해의 별 @ 예술의전당 (0) | 2021.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