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31_동곡미술관 방문
만약 생활을 위한 경제활동을 전혀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거대한 부를 쌓게 된다면 어떻게 삶을 꾸밀 것인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주변의 친구들에게 종종 묻곤 한다.
살 수 있는 가장 비싼 집을 사서 투자를 하겠다 /
그래도 일을 안 하면 허전할 테니 회사는 계속 다닐 것 같다 /
제주도에 카페를 운영하면서 살고 싶다 등등
지금의 삶 패턴을 유지하되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내겠다는 대답이 제일 많았고 그 다음으로는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쭉 하겠다는 대답도 몇 들은 적이 있다.
나도 후자와 마찬가지로 지금 머릿속에 그려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시간을 쏟아부을 것 같다.
직접 교류를 통해 답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완결된 삶을 감상하는 방식으로 굉장히 존경스러운 방식을 따른 사례를 이번에 만났다.
보문고등학교를 설립한 동곡 정형래 선생은 성공한 사업가라고 한다. 최근에는 학교 부지 내에 박물관과 미술관이 들어섰다. 홉페이지와 박물관에 소개된 취지를 보면 전통 문화를 매개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열린 배움의 공간, 문화유산을 경험하고 즐길 수 있는 시민 친화적 공간, 미래세대를 위하여 문화재를 보존, 조사하는 학습의 공간을 목표로 한다고 한다.
'가짐보다는 쓰임이 더 중요하고, 더함보다 나눔이 더 중요하다' 라는 설립자 동곡 정형래 선생의 뜻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보문고에서는 동곡미술관에서 새로운 전시를 기획할 때마다 단체로 와서 관람을 하고 간다고 한다. 몇몇 학생들은 전시를 보고 난 뒤 다시 홀로 전시관을 찾아 오래 감상하고 돌아간다고 하는데 한창 감수성 풍부하고 다양한 양분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시기에 상당한 수준의 작품과 유물을 지척에 두고서 편하게 자주 관람할 수 있는 환경이 굉장히 부러웠다. 이러한 환경이라면 동곡 선생의 바램대로 긍정적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될 게 틀림없다.
보통 성공한 사람들은 모은 재화를 통해 가꾸는 데 혈안이 되기 마련인데 반해 동곡 선생께서는 그 재화를 통해 외부로 반출된 국내 문화재를 사들여 보존하고, 그걸 다시 지역주민에 언제나 볼 수 있게끔 공개하여 후대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려고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재화의 양과 화려한 유형 자산이 성공의 척도로 여겨지는 시대에서 만나보기 드문 높은 뜻을 가진 성공한 분과 그의 뜻을 품은 성과물을 볼 수 있어 자극을 받았다.
진도 출신의 풍속화가 석현 박은용 선생의 작품을 동곡미술관에서 전시중이다. 어머니께서 먼저 방문해보시고는 눈에 깊이 담기는 작품을 많이 만나시고는 내게 추천해주셔서 함께 찾았다.
들어가는 길이 복잡해서 잠깐 헤매야 했지만 곧 신축 건물이 눈 앞에 보였다.
올해로 개관 3년을 맞았다고 한다.
1층에서 석현선생의 수묵화들을 먼저 감상했다.
으레 수묵화라 하면 거리감과 함께 관록이 느껴지고 상세하지 않게 여유로운, 그리고 여운 짙은 인상을 받아왔는데 석현 선생의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비슷한 구도(평면을 앞부분에서 한번 접은 듯한 입체감이 공통적으로 느껴졌다.
맨 뒤에 산을 배경으로 중간에 한번 언덕진 듯한)를 공통으로 해서 곳곳에 담긴 소재들이 존재감을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대상의 경계면은 짙고, 옅더라도 존재감 있는 선으로 꼭 구분이 되어있었고, 멀리서 보면 되게 치밀한데 가까이서 보면 어떻게 그렸을지 감도 안 오게 뿌연, 하지만 치밀하게 붓이 오간 흔적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그림 속 풍경이 예전 어렸을 적 보던 정겨운 모습들 그대로라고 하여 향수를 불러일으킨다셨다. 반면 당시를 겪어보지 못했기에 이미지가 머리속에 없는 나로써는 거꾸로 이를 통해 그때를 회상해보는 방식으로 감상을 해야 했다. 관람객의 입장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동일한 대상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게 되는 모습이 신기했다.
네델란드에서 고흐가 그려낸 것들도 석현 선생께서 그시절 풍경을 기록한 것과 같은 취지였겠다 싶었다.
붓길 자체는 치밀하지 않지만 표현된 결과물은 너무도 그윽해서 한참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특히 해동이라는 제목의 돌담과 들녘의 들꽃이 담긴 작품은 되게 오래도록 눈길이 갔다.
눈으로 감상했다기 보다는 눈을 통해 머릿속으로 그려본 이미지를 감상했다고 해야겠다. 여운이 한참을 갔다.
3층에서는 우리나라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가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오래된 소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잠깐 의심이 되기도 했다.
대략 둘러보고 나오는데 관리하시던 학예사분께서 직접 올라오셔서 간단히 소개주신다고 해서 함께 다시 둘러보게 되었다. 진귀한 유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고조선 시대의 청동 유물(그 중 세형 장검은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검 중 가장 긴 물건이라고 한다.), 공민왕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금 술잔 (우리나라에서 왕의 금잔 유물은 이 물건 딱 한 점이라고 한다.), 고구려대의 불상(고구려대 불상은 20여점이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그 중 3점이 여기 있었다.) 등등 진귀한 작품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었는데, 전에 보림사에서 철불을 바로 앞에서 바라봤을 때만큼 감동적이었다.
그 외에 충청도에서 사용되었던 마을 공용 상여 (예전에는 마을마다 공용으로 상여를 구비해두었다고 한다.) 독무덤, 세밀하게 세공된 은제 장식, 불감 등등 소중한 자료들을 여유롭게 자세히 감상할 수 있었다. 보존을 명분으로 꽁꽁 숨어있었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후대와의 소통을 통해 공통된 미의 명맥이 이어질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설립자의 취지에 다시 감사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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