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14
점심시간에 회사 북카페 장서를 훑다가 승정원일기를 간추려 엮어둔 책에 눈길이 가서 읽었습니다. 기록 남기는 것에 관심이 많아 과거의 기록에 관한 책들을 알게 되면 하나씩 골라보고 있어요.
기록을 읽으면서 가정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합니다 ㅎㅎㅎ
이번에는 일성록이라는 책을 소개받았습니다.
왕의 일기 격인 기록물이라고 하는데 이 다음에는 요걸 읽어보려고 합니다.
승정원은 왕실 직속 기관으로서 오늘날의 비서실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 창덕궁 내부에 관청을 두고 왕의 가까이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습니다.
이것들을 정리해서 일과를 마치기 전 모두 정갈하게 옮겨 적은게 승정원일기라고 합니다.
(때문에 활자인쇄물인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승정원일기는 모두 필사본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벤트들을 결과론적 관점으로 정리 후 재조명해서 적는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승정원일기에는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실시간으로 소상한 내역을 모두 적는데 덕분에 둘을 비교해서 다면적으로 각 사건들을 재조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례로 어떠한 상소에 관한 내용을 조선왕조실록 에서는 취지, 요약한 내용, 결과 등의 주요 내용이 기록을 작성한 주체의 관점으로 기록되어 있다면 승정원일기에는 상소문 전문, 상소에 참여한 인물들의 이름(천명이 넘더라도 전원의) 모두가 소상히 남아있어요.
아쉽게도 임진란 등으로 인해 광해군 전의 승정원일기는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양에 있어서는 조선대 전 기록이 남아있는 조선왕조실록에 비해 5배가 넘는 양이 전해진다고 합니다.
책은 승정원일기 전문을 하나하나 다루지 않고 사회적 주제별로 묶어서 조선의 시대상이 어땠는지 들려줍니다.
체계적이고 상호보완적인 국가 체계 시스템, 영조와 신하들간의 권한 견제 모습, 왕의 보고를 주관하던 승정원의 권위 등등의 당대 사회 구조를 엿볼 수도 있고, 함께 무언가 불만이 있으면 창덕궁 입구에서 왕더러 들으라며 난리 치던 사람들의 이야기, 신입사원의 기세등등함을 꺾기 위해 고참들이 행하던 신래라는 이름의 가혹행위, 왕의 유모의 지위(정3품 정도로 되게 높은 지위를 지녔고, 왕들도 유모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어머니만큼 극진히 모셨다고 합니다.) 멧돼지나 개가 궁 안으로 들어가도록 두어서 벌을 받은 문지기 이야기 등 인간적이고 엉뚱한 일도 함께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조선 후기의 시대상 - 인구가 늘고 수요가 늘어 과거를 통해 매해 뽑는 관리 수가 10만명을 넘기도 했다는 이야기 등등 과거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어느정도 알 수 있기도 했습니다.
책을 통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건 국가관이 지금과 굉장히 사뭇 달라보였다는 점이었어요.
거시적 관점으로 적힌 기록이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낀 걸 수 있겠지만 국가 구성원들의 삶의 목표가 국가의 운영에 초점이 오롯이 맞추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국가로 묶이는 공동체를 나로 동일시하는 개념이 보였습니다.
유교 이념에서도 이러한 냄새를 깊게 맡을 수 있지요. 이 컨셉을 접하고 있자니 지금 세대가 느끼는 옅은 국가관과 비교되면서 동시에 그렇다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목표는 어디에 맞추어져 있는지, 우리는 나의 범위에 어디까지를 담는지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요즘 세대에서는 삶의 목표를 위국 헌신만을 꼽는 경우는 드물지요.
국가 단위보다는 좀 더 작은 소속회사, 지역사회, 가족 (여기까지도 지금 기준으로는 되게 옛날 스타일 같습니다.) 더 나아가 특히 가장 최근세대는 개인의 단위에만 나라는 정의가 적용되는걸로 느낍니다.
또는 목표가 하나가 아닌 여럿으로 나뉘어서 어떤 분야는 이 소속으로서, 어떤 분야는 다른 소속으로 다면적으로 갖고 있는 사람도 많다고 느꼈습니다.
사회가 문명화면서 기본적으로 보장받는 권한이 여간해서는 흔들리지 않은 세상에 (최소한 여기 계신 분들께서는) 살고 있습니다. 자연스레 그래서 좀 더 고도화된 수준의 목표를 찾게 되구요.
이는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가족을 이루고 후대를 잇는데 오롯이 집중하던 시절에 맞춰진 삶의 방식에 맞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혼란이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생각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따라야 했고 또는 주변 사람들의 것을 그대로 따르던 시대가 아니라 스스로 찾아나서야 하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삶의 목표를 스스로 다시 만들어야 하는, 그래서 삶의 목표가 내가 사는 이유를 찾아야 하는 식으로 뭔가 꼬이게 되는 삶을 사는 경우도 많지요.
우울과 무료함 등도 여기서 일부는 기인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봄 여름 가을을 거쳐 먹을 곡식을 모으고, 겨울날 땔깜을 준비하고 다시 새 해가 오면 다음해를 준비하는 등 자연을 따르는 사이클을 계속 이어나가던, 그래서 나의 후손이 나를 이어서 또다른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던 시대를 책을 통해서 잠깐 살아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후대를 이을 생각을 하지 않는(또는 못하는) 세대를 대입해보기도 했구요.
그 동안 삶의 목표가 아예 다른 쪽으로 옮겨간건지, 아니면 겉으로는 과거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보이지만 실상은 삶의 목표를 생각할 여력이 없을 정도로 가혹한 사회가 된건지 고민해볼 수 있었습니다. 사회가 많이 바뀌어오고 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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