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12
연말에 가까워 이리저리 일들이 많아진 까닭에 계획했던 책들을 다 읽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출퇴근길이나 점심시간 짜투리 시간에 악착같이 책을 읽던 습관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다시 슬금슬금 불을 붙이고자 가벼운 책들을 회사 도서관에서 구해다 하나 둘 읽어보는 중이다. 이병률씨 책 바로 옆에 있던 낡은 책이 눈에 띄어서 작가 이름을 보니 김훈이었다.
잘 아는 작가는 아니지만 명성을 믿고 + 산문집이라니 가벼운 마음에 집어서 읽어보았다.
밥, 돈, 몸, 길, 글 크게 5가지 주제에 관해 자유롭게 사색을 하면서 동시에 종이에 옮겨적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내 짐작으로는 글을 막 시작할 시점에는 글감만 있을 뿐 주제는 나중 되어서 정해졌을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지어진 글이기에 처음에는 거부감을 느꼈다. 그냥 의미없는 이야기들의 순환으로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다시 보니 인공적이지 않고 오히려 '일상 속 소재에 대한 집중 -> 연결된 1차적 생각들의 나열 -> 나열된 추상 속에서 새로운 생각의 등장 -> 새로운 결론' 순서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발제 순서를 발견했다. 반면 나는 지금 추상 주제를 하나 정하고 하위 분류를 서서히 펴내가는 방식으로 글을 적고 있는데, 군더더기 없고 통일성을 지닌, 효율적 구조가 짜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순서를 거스르는 듯한, 글을 억제로 짜맞추기 위해 인공적으로 정리하는 느낌이 든다.
김훈작가처럼 적는 방식은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참고할 만한 방식이었다.
문체에서는 굉장히 부러움을 느꼈다. 백건우 선생님의 연주에서 느껴지는 묵직함 비슷한 관록을 그가적은 글에서 느꼈다. 글 쓰는 방식, 살로서 붙어있는 말들의 무게들(존재감들), 그 속에 숨은 뜻과 분위기 등등에서 검고 손마디 굵은 주름진 손에 잡힌 묵은 만년필이 연상되었다. 시시콜콜한 글 같아도 그 속에는 그만의 숨결이 느껴진다.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글들이다. 나도 이런 나만의 분위기를 글로서 낼 수 있는 시점을 빨리 앞으로 가져오고 싶다.
글을 통해 느끼는 그의 관념에서 많은 공감대를 얻기도, 갸우뚱하게 만드는 관점도 많이 보았다. 글에 드러나는 그의 가치관은 굉장히 일관적이었는데, 이 점에서도 그의 굳은 줏대가 느껴져서 더욱 어른스러운 사색으로 느껴진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무형의 것을 유형의 것보다 더 중요시하는 자세 / 행위의 인과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점 /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는게 친환경적이라는 관점 크게 3가지가 주요하게 자주 보였다.
먼저의 두 관점은 마치 더 성숙한 나를 마주하고 그에게서 현재보다 진일보한 나의 관점을 소개받는 느낌이었다. 다만 마지막 관점은 공감할 수 없다.
'자연에 순응하고 만든 자연대로의 구불구불한 길을 요새는 직선화해버리니 슬프다..'
'첨탑 위에 위태롭게 지은 듯한 까치집이지만 실제로는 오랫동안 견고하게 한참동안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준다. 반면 문명의 총아라고 하는 비행기는 추락하여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인간의 문명이 아무리 발전한들 자연이 이뤄온 것들의 우수성을 넘지 못한다.'
겉으로 표현되는 산의 능선이나 초록의 색 등 자연의 외형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만을 과연 친환경적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또한 새들이 지내는 동안의 단순 정적 하중을 버텨내는 둥지와 운행주기동안 겪는 수만회가 넘는 감압 가압을 견디고, 항상 이동하며 순간마다 맞닥뜨리는 동적 부하를 견뎌내는 비행기 동체를 비교하면서 자연적인 것이 위대하다고 말하는 관점 과연 타당할까. 비행기 동체는 자연에 없던 것을 창조해내어 만든 것도 아니고, 새 둥지또한 자연이지 않고 새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자연적이지 못한 구조물이다.
나는 이렇게 맹목적이거나, 눈에 보이는대로, 자신이 현재 아는 만큼의 기준만을 잣대로 친환경의 여부를 단정짓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최근에 발표된 산림청의 산림관리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산림자원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서 기존의 고령 나무들을 정리하고 생태기후환경과 경제성을 고려한 새 품종을 선정하여 늦게 전에 교체해야 한다는 논지의 정책이었는데, 이에 대해 가만히 잘 자라있는 나무들을 베어내어버리면 어떡하냐는 것이었다.
식물에 대한 지식을 조금만 더 찾아볼 노력을 한다면 이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 조림의 역사를 보면 황폐화된 민둥산에 식물을 안착시키려고 강하지만 생이 짧은 식물들을 먼저 정착시켰고 차차 고유 품종, 수명이 긴 우수한 품종으로 교체해나가 지금의 겉으로 보면 완벽해보이는 산림이 일단 만들어졌다.
다만 나무들도 수명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가끔씩 마을 앞에 장수하는 나무들은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이다. 과수원의 과실수의 경우는 양질의 관리를 받음에도 20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마침 지금 안착된 종들은 일괄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심어졌고 생애 주기에 따라 조만간 동시다발적으로 수명을 다할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속아내기와 함께 세대교체가 필요하고, 그 와중에 건강하고 경제성있는 산림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선별이 필요한 것이다. 목재로서 활용을 함으로서 순환을 해 나가야 다시 체계적인 관리를 할 수 있는 예산이 확보되고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본인들이 아는 범위만을 전체로 인식하고 그 안에서 판단을 내리는 오류를 흔히 범한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닐 거라는 것을 항상 전제하는 습관을 지니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다. 나 역시도 반복적으로 이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몸소 느낀다.
유사 이래로 지식은 양이 너무나도 방대해져 개인이 모든 지식을 담을 수는 도저히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히려 더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어떤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내놓는 대신에 경향으로서 (아무래도 ~, ~할 것으로 보인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해보인다) 애매하게 말하는 것을 본다. 심지어 사물을 이루는 기본 단위들도 어느 한 순간의 위치는 확률로서만 정의가 가능하다는 것도 증명되었다.
자아와 가치관을 공고히 함으로써 나의 존재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자기성찰하는 자세를 갖추고 항상 내 생각을 검증하는 자세도 동시에 갖출 필요가 있다는 걸 다시 상기했다.
글의 나머지 대부분을 보면 그가 지닌 방대한 지식과 자기성찰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유독 자연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왜 이러한 고집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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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하고 피곤한 저녁에, 잠든 아이의 머리에 코를 대고 아이의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때때로 슬펐다. 내 슬픔은 결국 여자의 태에서 태어나서 다시 여자의 태 속에 자식을 만드는 포유류의 슬픔이었다. 여자의 태는 반복과 순환을 거듭하며 생명을 빚어내는 슬픔의 요람이었다. 그 어린아이가 자라서 또 여자가 되었다. 결혼을 해도 좋을 만큼 자란 여자 성인이 된 것이다.
이 여자아이가 또 여자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여자아이를 낳을 것이다. 나는 이 진부하게 순환되는 삶의 일상성 속에서 기적과도 같은 경이를 느꼈다. 삶은 느리고도 길게 계속되는 것이고, 무사한 그날그날 속에서 젖을 토하던 아이가 다시 큰 여자로 자라는 것이다.
이 무사한 하루하루가 흘러 결국은 저 차가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더라도 그 시간 속에서 핏덩이는 자라서 여자로 변한다. 그 아이는 내가 기른 아이가 아니라, 저절로 자란 아이였다. 무사한 날들의 이 한없는 시간들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 아이를 여자로 길러줄 것인가. 그리고 그 생명의 고유한 힘이 아니라면 어린아이가 어떻게 여자가 될 수 있는가.
-> 흔한 일상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되돌아보다가 문득 삶의 섭리를 새삼 느끼는 대목.
인사동 라파엘의 집은 술과 밥을 파는 식당으로 바뀌었다. 밤마다 이 식당에는 인사동 지식인들이 몰려든다.
-> 보육원이 자본주의 논리에 밀려 차츰 밀려났는데 이를 외면한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을 간접적으로 현상 표현만을 통해 비판함. 우아한 표현 방식으로 느꼈음.
잘빠졌다의 주어는 여자가 아니라 사물이고, 개체가 아니라 익명이며 규격이다. 이 익명성의 규격에 따라 여자들이 사물화될 때 여자들의 아름다움은 점점 더 도발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잘빠진 것이 아름다운 것이므로 여자들은 점점 더 잘빠져나올 것이다.
남자가 남성성만으로 온전할 수 없듯이 여자들도 여성성만으로 온전할 수는 없다. 남자는 남성성을 완성해야 하고 여자는 여성성을 완성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말할 순 없다. 그래가지고는 피곤해서 살 수 없다. 남자에게도 여성성이 있고 여자에게도 남성성이 있게 마련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그것을 긍정해주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다. '잘 빠졌다'는 말은 공업적인 말이고, 더러운 말이다. 그 더러움은 사물성에서 온다. ' 잘빠졌다.'는 말 속에서 잘 빠진 여자는 소외된 여자다. 인간과 언어가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다. 인간이 인간이 아닌 것으로 바뀔 때 더러움이 발생한다. 아름다움의 내용을 억압과 사물성이 아니라, 자유로 가득 채우는 여자가 아름답다. 그런여자가 살아 있는 여자고, 살아가는 여자고, 삶을 영위하는 여자다. 아들들아 연애를 하려거든 그런 여자하고 해라.
-> 의의를 외부의 평가에서 얻지 않고 자신 스스로 정의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럼으로써 동시에 남의 모습에 대해 일방적으로 단정짓지 않을 수 있다.
포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내내 신라나 가야 시대의 대장간을 상상하고 있었다. 포항제철소는 가야의 대장간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르가. 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변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쇠는 대체 인간에게 무엇이었으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비행기 안에서 나는 그런 질문에 스스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 짧은 글은 그 질문에 대한 내 자신의 대답이다.
...포스코의 첨단 컴퓨터 앞에 앉은 일류기술자들과 가야의 대장장이는, 내가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들은 가장 긍ㄴ원적인 조건들을 끌어모아서 최첨단의 문명을 지향하는 인간들이었다. 포스코의 용광로를 바라보면서, 나는 변하는 것보다 변할 수 없는 것들이 인간에게는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 시점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고 유지되는 인간 삶의 본질적 속성
나는 중앙박물관의 고대 토기 앞에서 머뭇거렸다. 이런 망설임을 스스로 위로하려고 백제 토기를 재현해내고 잇는 토기 가마를 찾아갔다. 충남 부여에 있는 '백제요'의 가마였다. 거기서 나는 오랫동안 가마의 어두운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 어둠은 지극히 인공적인 공간이었지만 그 인공성을 제가하려는 또다른 인공적인 장치들을 구비하고 있었다. 인공성을 제거하려는 또다른 인공성에 의하여 우리는 자연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는데, 그때의 아름다움은 인공자연이다. 인공 자연은 자연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인간에게 친숙하고, 인간과 자연을 매개하는 해설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하나라는 존재의 모습은 늘 나를 질리게 한다. 산속의 무덤들은 여럿이 모여 있찌만 그 모임은 군집일 뿐 소통은 아니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개별적 행위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다들 혼자 죽어서 저 혼자만의 무덤을 이룬다.
새 두마리가 날아갈 때, 세상의 질감은 완전히 바뀐다. 새 두마리가 날아가는 풍경은 '함께'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둘'이라는 실체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이고 '둘'이란 그 '하나'의 중첩에 불과한 것인가. 이런 질문은 쓸데없어 보이지만 고통스런 질문이다. '새 두마리가 날아간다'는 언어는 가능한 것인가. 두마리란 한 마리가 두번 겹쳐져 있는 풍경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나는 그런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새 두마리가 날아가는 풍경은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풍경보다 나에게는 편안하게 느껴진다. 두 마리는 덜 위태로워 보인다. 새 두마리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두 마리의 새는 풍경과 대치하고 있기보다는 새끼리 서로 대치하고 있다. 이 관계는 난해하다.
-> 전체를 이루는 개체들의 개별적 속성을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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