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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근본적 경험론에 관한 시론 - 윌리엄 제임스

20/08/16

 

 피천득씨의 인연을 읽던 중 그가 딸과 주고 받은 편지글에서 화이트헤드, 러셀의 이름을 접했다. 이학자인 동시에 철학자이기도 한 두 사람의 배경에 끌려 그들의 책을 읽게 되었고 그렇게 실용주의자들의 이론에까지 관심이 닿았다.
책을 통해 얻게 된 지식과 사유에 앞서서 이렇게 독서에 독서가 이어지는 순환에서 행복을 느낀다.

 이제까지 남긴 후감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최근에 가졌는데 시기별로 적었던 사색들을 돌아보던 중 지금은 당연한 나의 것으로 여기는 사상 중 많은 수가 비교적 최근에 얻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주요 경험들 이전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던가 잠시 생각했다.
이 점에서 의식에 관하여 경험론자들의 의견에 공감한다. 경중을 떠나 내가 겪었던 모든 경험의 시점을 전후로 하여 나는(내 의식은) 바뀐다.

 의식, 영혼 또 혹자는 선험적 자아라고도 말하는 대상의 실체는 허구라고 윌리엄 제임스는 말한다. 책 전반에 거쳐 경험론에서 정의하는 의식에 대한 내용이 계속 열거된다.

“정신의 원리는 내용이 ‘인식된다’일 뿐 명칭에 불과하다.”
“실재가 날마다 일시적으로 창조되므로 개념들은 결코 지각을 대체할 수 없다.”
“의식은 허울이며 경험이 이를 대체해야 한다.”
“초시간적인 의식은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것의 목격자일 뿐 아무 역할이 없다.”
“의식은 그 자체로는 비인칭적이고, 비존재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제 1원리들 사이에 낄 수 없다.”
“경험간의 덧셈을 통해 의식과 내용이 등장한다. “
“구체적인 것에서 사고가 완전히 실재적인 반면 그 존재는 허구적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것에서 사고는 사물들과 동일한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

 기억에 남아있는 영혼에 대한 마지막 진지한 고민은 아마 초등학교 언젠가 마음이 가슴 속에 있는지 머릿속에 있는지 수업시간에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였던 것 같다.

 최근까지 나를 구성하는 요소를 의식 / 신체 두 갈래로 분류해왔는데 이번의 신선한 충격에 재고해보게 되었다. 이어서 순수이성비판을 읽는 중인데, 다루는 문제가 비슷하여 먼저 이뤄낸 수고 덕분인지 이해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인생은 해상도를 높여 나가는 과정이다. 지식과 경험을 얻을수록 인생이라는 프레임을 이루는 화소의 갯수가 많아지고 동시에 촘촘해진다. 점차 같은 면적 안에 더 많은 기본요소가 쌓이고 세상을 보는 시야와 사고는 더 명확해지고 분명해진다.
생각할 생각조차 하지 못해보았던 사고를 자주 하게 되는 요즘인데, 이번 역시도 프레임에 픽셀이 10개는 최소 늘어난 느낌이다. 뿌듯하다.

* 경험론 앞에 근본적(Radical)이라는 용어를 붙인 이유는 흄의 그것과 구분을 하기 위한 것인데, 그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깊이 읽어야 해서 너댓번을 다시 읽었는데도 겨우 일부만 받아들인 느낌이다. 계속 곱씹어볼 만한 책이다.

* 경험간의 교차점에서만 의식이 발현된다고 말하는데, 모든 생명체에겐 경험 이전의 장소에 담긴 본능적인 능력들이 있다. 모성애나, 생식욕구, 아기 사자가 젖을 먹을때 무의식적으로 발을 굴리는 행동 등. 이런 점에 대해서 경험론자들은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문득 중간에 궁금해졌다. 또한 선험적 자아를 허구라고 제임스가 말하는 반면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선험적 인식만이 시간, 공간을 인지할 수 있다고 했다.
서로 상충되는 모습을 보면서 근원적으로 내가 먼저 존재하는건지, 시간과 공간이 먼저 존재하는건지 아리송한 혼란을 잠깐 겪기도 했다. 뭔가 꿈을 꾸고 있는 느낌이다. 관련 이론을 좀 더 접할 필요를 느낀다.


책갈피 남긴 부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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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험론은 합리론에 대비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합리론은 보편자를 강조하고 논리의 질서와 존재의 질서에서 전체를 부분보다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경험론은 부분, 요소, 개별자를 설명에서 강조하며, 전체를 하나의 집합으로, 보편을 추상으로 취급한다. 사물에 대한 나의 기술은 그러므로 부분들에서 시작하고 전체를 이차적인 것으로 만든다.

 관념들(경험으로 이해)은 불연속적이다. 각 관념의 내용은 전적으로 내재적이며, 관념과 동일실체인 그리고 그것을 통해 관념의 존재가 통합되는 이행은 없다. 당신의 메모리얼홀과 나의 메모리얼홀은 심지어 둘 모두가 지각표상일 때조차 서로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유아론들의 덩어리이며, 엄격한 논리에 따르면 그러부터는 담론의 우주조차 오로지 신만이 구성할 수 있다. 나의 대상과 당신의 대상 사이에는 어떠한 역동적 흐름도 오가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은 결코 동일한 것 안에서 만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그 존재를 그토록 인정하고 싶어하는 이 의식을 어떻게 상상할까요? 그것을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만, 우리 모두는 그에 대한 직접적 직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의식은 자신을 의식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심리학자든 비전문가든 처음 마주치는 사람 아무에게나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고, 즐기고, 고통받고, 용막하는 것을 스스로 숨 쉬는 것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느낀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신적 삶을, 활동적이고, 가볍고, 유동적이고, 섬세하고, 말하자면 투명한 일종의 내적 흐름으로, 그리고 물질적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 정반대되는 것으로 직접적으로 지각합니다. 요컨대 주관적 삶이란 나타나는 어떤 객관적 세계의 존재를 위해 논리적으로 불가결한 조건일 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체를 감각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감각하는 경험 자체의 요소이기도 합니다.


지식 이론의 주된 명제 (책 전체 내용을 요약하는 것으로 이해함)

1.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의식은 버클리가 최후의 일격을 가한 물질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2. 실제로 존재하고 “의식"이라는 말이 포괄하는 진리의 부분을 형성하는 것은 알려지거나 인식된 경험의 부분들이 가지고 있어서 고나련되고 인식되는 감수성이다.

3. 이러한 감수성은 특정한 경험들이 명료하게 성격화된 매개적 경험들을 거쳐 다른 경험들로 이어지고, 그럼으로써 그들 중 어떤 것이 인식되는 것의 역할을, 다른 것이 인식하는 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

4. 이 두 가지 역할은 경험의 조직 자체를 떠나지 않고, 또한 초월론적인 어떤 것도 환기하지 않으면서 완벽하게 규정될 수 있따.

5. 그러므로 주체와 대상, 표상되는 것과 표상하는 것, 사물과 사고 등의 속성은 극도로 중요한 실제적 구별을 나타내지만, 저것은 단순히 ‘기능적’ 질서일 뿐 결코 고전적 이원론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존재론적 질서가 아니다.

6. 끝으로 사물과 사고는 기본적으로 이질적이지 않으며 동일한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 우리는 그 재료를 그 자체로 규정할 수 없고 다만 느낄 수 있을 뿐이며, 저것에 이름을 붙인다면 경험 일반이라는 재료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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