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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관람기

탕탕평평, 글과 그림의 힘 - 국립중앙박물관

 

24/02/03

 

*기록해둔 지 1년이 거의 지나서야 정리하는 관람 후감

 

홀로 자유롭게 저녁 시간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아마도 앞으로 얻기 쉽지 않을 기회였다.

무얼 할 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인스타에서 스치듯 보았던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 홍보물이 떠올랐다.

그래서 차를 몰고 무작정 박물관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중앙박물관을 방문한 때를 헤아려보니 코로나가 한참 유행하던 시절이다.

하루 방문인원에 제한이 있었고 시간대별로 관람할 수 있는 인원이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막 시작한 전시를 예약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어느 박물관이나 마찬가지였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던 이건희 컬렉션을 보고 싶었는데 이 까닭에 아직도 관람하지 못했다.

아마 지금쯤은 편하게 관람할 수 있겠다 싶지만 언제쯤 시간이 날 지 모르겠다.

이게 떠올라서 검색해보니 아마도 이 제한은 없어진 듯했다.

다만 아쉽게도 특별전시실은 여전히 사전 예약을 해야 했으며 아쉽게도 이미 마감되어있었다.

전에는 밤 늦도록 여는 시간이 수요일 뿐이었다. 그것도 문화의 날이라고 해서 특정한 주에만 늦게 운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어느새 토요일도 21시까지 운영하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자차를 이용해서 방문했다. 1시간이 걸리지 않아 오후 7시에 도착했다. 마감 2시간 전이었다.

평소같으면 주차장 입구부터 긴 줄이 늘어서 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한산했다.

주차 후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가니 박물관 앞 정문을 생략하고 바로 건물 입구로 들어설 수 있었다.

반가운 드넓은 천장이 눈 앞에 나타났다. 2년 반 만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은 규모가 엄청나다. 60mx400m정도 크기에 3층 규모로 길쭉한 형태이며

네모반듯하지만 허리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부분과 돌출된 로툰다 덕분에 지루해보이지 않는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 / 단순함에서 오는 화려함 등을 건축의 기본 개념으로 잡고 지어졌다고 한다. 

 

좌측의 특별전시실로 사용하는 공간과 우측 본관 사이로 파티오 같은 넓은 공간이 있다. 뻥 뚫려있어 남산이 액자 속으로 보인다.

박물관을 방문할 때면 유독 비가 오는 날이 많았다. 이번에도 역시 비가 오고 있었고 봄이 오기 전이라서 꽤 쌀쌀했다.

초저녁 멀리 있는 남산이 어스름하게 보이고 빗소리는 들리는데 비는 닿지 않는 아늑한 공간 안에서

푸른 빛을 뿜는 남산타워를 멀리서 옅게 들려오는 도시소음과 함께 보고 있으니 특별한 공간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방문한 독립기념관의 겨레의 집에서도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 곳도 외부와 뻥 뚫려있지만 아늑하게 감싸주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초저녁, 비오는 소리, 옅은 비, 차가운 공기, 주변에 가득 담겨있는 유물들 등을 감각하고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느낌인 듯하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엄격히 행해지던 때에는 로비 입구가 검색대, 대기줄 등으로 복잡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홀은 간단한 검색대만 남고 모두 사라져 있었다.

예전 마스크를 벗고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던 첫날의 이질감을 다시 느꼈다.

 

 

 

이번 전시는 영조-정조대의 기록유산을 담았다.

 

영조, 정조대에는 임금의 업적에 대한 기록물에 타 기간에 비하여 굉장히 많다고 한다.

글이나 그림, 행차도 등 다양한 양식으로 많은 기록물이 남아있다.

단순히 기록하여 남기는 것을 중요시한 까닭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전시를 통해 소개받기로는 사연이 있었다.

 

박문수에게 하사한 반신상. 2부를 제작해서 하나는 개인에게, 나머지는 충훈부에 보관했다고 한다.

 

영조는 선왕의 형제로, 정조는 폐위된 세자의 자식이라는 배경을 가진 까닭에 정통성에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붕당으로 인해 정치적 상황이 혼란하여 왕권마저 영향을 받는 상황에서 이를 바로잡을 것이 필요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본인의 업적을 스스로 홍보하는 목적이나 신하의 충성심을 높일 수 있게끔 초상화나 그림 등을 하사했는데

이러한 경우가 조선시대 중 영-정조 대에 가장 많았다고 한다.

탕평책 또한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에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시도 중 하나이겠다 싶었다.

기록을 남기는 것도, 업적을 쌓는 것도 모두 그 근원에는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을 것이다.

 

청계천 준천 장면. 행사로서 왕이 직접 행차해서 바라보았나보다.

 

전시에서 소개받기를 탕평이라는 말은 유교의 핵심 경전인 서경에 등장하는 말로

‘임금이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면 임금의 도가 넓어지고 평탄해져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까지 이른다’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준천(하천을 정비)하는 모습, 도목정사(인사발령을 위한 행정 절차) 등에 참여하는 모습을 기록한 서화들이 많았다.

 

 

 

 

보통 고화 하면 농담이 짙은 수묵화를 떠올리는데 이번에는 그런 류가 아닌 채색화,

그것도 현대 인포그래픽 등에서나 볼 법한 화풍의 그림을 보았다.

대부분의 기록이 글로 남아있는 데다가 그 와중에 대부분 한문으로 적혀있기에 과거대의 기록과 단절감을 느껴왔는데

이번에 본 그림은 마치 당대에 생존하는 사람과의 직접 소통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중에는 지금도 보존되어있는 건물의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도 있었다. 

창덕궁, 규장각, 청계천 등등 예전 모습과 지금 모습을 비교해볼 수도 있었다. 

처마가 동남아시아 건물들처럼 좀 더 둥글게 표현한 것이 눈에 띄었다.

 

보수작업을 하면서 지금의 각진 형태로 바뀐걸까 아니면 행각을 표현할 적에 입체파 그림처럼

보이는 대로가 아닌 존재하는 대로 그린 것처럼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그린 것일까 궁금하다.

 

 

 

건물의 창살, 기와 등이 모두 세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어처구니들 하나하나와 용마루의 취두, 그리고 취두에 밀려 한 층 밑으로 내려온 용두 등도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최근에 보고 온 숭례문의 취두와 굉장히 닮아있었다.

이 전시만 보러 온 덕에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쫓기지 않고 그림에 등장하는 구조물 하나하나를 다 눈에 담아보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등장인물의 소매, 신발, 엎드린 모양, 갓, 복식, 몸짓 등이 엄청 세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사극에 등장하는 관료의 복식이 실제 예전의 그것과 같은지 항상 궁금했는데 과연 그대로였다.

무관의 복식도 박물관이나 사극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화살, 신발, 복식 등의 모양과 색깔이 내가 봐 오던 그대로 그려져 있었다.

 

 

사도세자의 인장도 만났다. 옥으로 된 것과 금으로 된 것을 만났는데 정조가 왕이 된 이후 사도세자의 존호를 총 3차례 올렸다고 한다.

각각의 존호가 담긴 인면과 그 구성을 소개받았다. 도장을 팔 때 보통 네 구획으로 나누어서 각각 단어를 넣는데 의미가 궁금했었다.

덕분에 사례와 함께 내용을 볼 수 있었다.(보통 한자를 변화를 많이 시켜 넣어서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지금 내 도장도 나만 읽지 싶다.)

 

 

 

그리고 화성 원행도와 화성원행 반차도를 만났다. 

화성 원행도는 정조 19년 사도세자의 환갑 잔치를 위해 화성 현륭원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화성 원행 반차도는 화성으로 향하는 행렬의 예행연습을 위해 제작했다고 한다. 총 길이는 44.83m라고 하며

이번 전시에는 9.36m를 펼쳤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행렬에 속하는 사람들, 말, 무기, 그리고 행렬이 지나는 주변 마을의 사람들 하나하나 다 보이는데 300년 전이 멀지 않게 느껴진다.

 

 

전시를 다 보고서 시간을 일부러 조금 남겨서 상설 전시관의 두 군데를 들르고 왔다.

 

하나는 손기정 선생이 기증했다는 제우스 신전에서 발굴된 투구이다.

근대 올림픽에서는 종목 우승자에게 메달 외에 고대 그리스 유물을 수여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로 인해 수여받은 유물을 이리저리 빼앗겼다가 결국 되찾은 사연과 수천년이 지나 이역만리 이 땅에 자리잡은 사연이

신기해서 직접 보고 싶었다.

생각보다 크기가 컸고 투박했다. 푸르른 녹에서 세월이 느껴졌지만 역시 삼천년이라는 세월은 내가 추상 없이 실체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득한 세월인 듯하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세월을 머금은 유물이어서인지 굉장히 높게 느껴졌다.

장흥의 보림사 철불을 볼 때만 해도 '와.. 천 년 된 유물이구나' 싶었는데 이건 그 철불이 똑같은 소리를 할 정도로 오래된 물건이기 때문.

 

 

 

두 번째는 사유의 방이다. 두 반가사유상을 큰 공간을 할애해서 전시하고 있다고 했다.

방은 벽을 황토로 해 두었고 이유를 모르겠는데 바닥이 경사지도록 배치해둔 게 기억난다.

멀리서만 사진찍고 앞, 옆 뒷모습을 한참 눈으로 담아보았다.

 

 

나는 기록을 자주 하는 편이다. 일기는 거의 10년째 이어오고 있고 연말이 되면 그 기록을 모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다.

최근에는 기록을 정리해서 이렇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자료로 정제하는 과정까지 더했다.

이는 외부에 보이는 것보다는 내가 나의 기록을 손질하면서 다시금 되뇌이려는 목적이 가장 크다.

그런 점에서 정조대의 유물에서 유대감을 느꼈다. 참고할 만한 것도 많이 얻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관람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전시를 보는 것, 후감을 남기는 것 자체가 귀한 시점이 되었구나

관람한 지 1년이 훌쩍 지나서 기록을 정리하다니 조금 머쓱하지만 거꾸로 그 때 보고서 기록을 상세히 남겨둔 덕이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