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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HER

21/03/22

언젠가 길을 지나며 버스정류장에 걸린 형광색 포스터를 본 적이 있다. 당시에는 크게 관심갖지 못한 채 지나쳤고 거의 10년이 흘러서야 보게 됐다.

오랜 연인이었던 아내와 이혼하고, 실제 친구나 직장 동료와도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등 실제 외부와의 교류에는 관심두지 않는 대신 가상 캐릭터와의 게임 등 자기만의 세계에만 빠져든 주인공은 어느날 새로운 인공지능 OS 서비스에 가입한다. 그리고 사만다라는 이름의 가상 OS와 보통의 인간관계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사랑의 감정, 질투심 등이 뒤섞인 깊은 관계에 빠져든다. 형태가 있는 외부와는 전혀 교류하지 않고 무형의 것들과만 교류하던 주인공에게는 실체의 유무가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렇기에 거부감 없이 가상의 인물과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었나보다. 하지만 나중이 되어서야 사실은 그 OS와 자신의 관계와 똑같은 형태가 수만개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주인공은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사만다(OS) 역시도 과거 자료를 통해 복원된 어떤 과거의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건지 주인공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주인공은 그동안 자신이 외면했던 실질적 주변에게 손을 건네면서 영화가 끝난다.

영화에서는 형태가 있지만 의미가 없는 실체적 인간관계와, 형태가 없지만 소중한 의미가 담긴 무형과의 교류가 대비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 중반까지만 해도 실체의 허구성과 대신 의미의 중요성을 보여주려나 싶었는데 결말에 이르러서는 제아무리 의미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이를 담는 유형의 매개체를 무시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의 모습에서 내가 계속 보였는데 내가 특히 실체에 큰 비중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속에 든 의미, 의의 등에만 몰입하게 된다. 아무래도 외부에서는 나를 볼 적에 내 속 뜻은 알 수 없기에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데, 어쩌면 나만 편한, 이기적인 관점이 될 수도 있겠다. 그래서 감상 이후에 한참동안 나를 고찰해보았다.

삶의 유한성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짚어볼 수 있었다.

언젠가 인공지능의 발전 현황 대해 강연을 들은 적이 있는데 중간에 강연자께서 구글과 애플의 죽음에 대한 상반된 접근을 소개해주셨다.
구글이 구상하는 인공지능은 필연적으로 언젠가 낡고 없어지는 인간의 신체를 극복하고, 영혼을 영속시킬 수 있는, 죽음의 대체 관점에서의 인공지능인데 반해,
잡스의 애플은 죽음이라는 마무리가 삶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이정표라고 생각하고 이 관점의 철학을 제품 개발에 쏟고 있다고 했다.

나 역시도 잡스의 말에 한없이 동의한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인생의 총량이 정의되고, 내가 닿을 수 있는 실질적 목표, 인과관계가 정리되며, 나의 노년기 시점을 가시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반면 막연히 시간이 영원하다고 생각한다면 과연 지금 이 순간을 나는 발전을 위해 노력할 수 있을까?

사만다처럼 영원히 이론상 종속 가능하고 무한대로 사고가 발전된다면 그 끝은 우리가 추앙하는 성인에 다다를 것인가, 아니면 끝을 정의할 필요도 없이 맹목적인 받아들임의 결과로 중간에 자기 충돌로 인해 파괴되어버리는 운명에 닿을 것인가. 아마 후자일 거라고 생각한다.

결론으로

1. 껍데기라고 치부하던 것들이 하는 역할이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고,
2. 삶의 유한성에 대해 집중해보며 어느새 나 역시도 지금의 여유롭고 힘 넘치는 순간이 마냥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며 나태해져 있던 모습을 한번 반성하는 기회가 되었다.

기타 주목했던 점에는 남자주인공의 os에 대한 감정이 냉담할 때는 딱 1번을 제외하고 이어폰이 왼쪽에 끼워져 있었고, 핑크빛 사랑일 때에는 오른쪽에 있었던 점,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배바지를 입은 점, 그리고 점점 화려했던 주인공 셔츠색이 점점 채색이 없어졌다는 점 정도.

나는 책도 영화도 드라마도 깊이 감상하지 못하고 굉장히 빠르고 옅게 주 요점 위주로 보는 편이다. 그래서 이따금 다른 분이 적어둔 세심한 영화 후기를 보면 내가 숙제를 대충 한 것 같은 찝찝함을 느낀다. 이번 영화는 다른 사람들의 평을 볼 필요도 없이 엔딩 크레딧이 나오자마자 놓친 부수적인 부분이 많은 것 같은 느낌을 세게 받아서 조만간 다시 봐야겠다. 마음에 쏙 드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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