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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빅피쉬 - 팀 버튼


22/11/20

친한 친구는 넷플릭스 죽순이다. 항상 조용하다 싶으면 넷플릭스를 보고 있다. 반면 나는 드라마나 영화 등 영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영화를 예술작품처럼 대하고서 깊이 감상하는 걸 잘 안 해봤다.

이번에는 친구가 빅피쉬라는 작품을 보더니 꼭 한 번 보라고, 네가 만든 영화인 줄 알았다고 세상에 너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지만 영화 제목에 생선이 들어가서였을까 선뜻 손이 가지 않아서 추천받고서도 한참을 찾지 않다가 지난 주말에서야 시간을 내서 봤다.

넷플릭스에 있대서 찾아봤는데 같은 계정이라도 나라마다 작품의 저작권 상황이 다른지 여기서는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 숙소 인터넷 티비에 있어서 지난 주말 맥도날드 치킨과 함께 느긋하게 감상했다.

주인공 에드워드의 삶을 훑는 식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유년시절은 어떠했고 어떤 사람을 어떤 계기로 만나고 교류했는지, 아내를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는지 등등이 나온다. 이걸 대략적으로 남겨두려고 줄거리를 나열을 해보았는데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다. 그래서 줄거리를 정갈한 기록으로 남겨두는 건 포기했다. 기억에 남는 것들만 추려서 기록해두고자 한다.


줄거리에 관련된 인상깊은 것들

-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이 가장 인상깊었다. 가족에게 이야기하기를 유년시절 주인공은 자신의 죽는 모습을 미리 본 적이 있다. 동네에 사는 외눈박이 마녀의 유리 눈알을 바라보면 이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자신이 당시에 무얼 보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임종 직전에서야 뜬금없이 갑자기 아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를 묻는다. 아들은 황당해하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고 아버지를 안심시키려는 마음에서 아버지 방식의 허풍스러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시간이 없다고 재촉해서 아버지가 좋아하던 빨간색 스포츠카를 함께 타고 강가로 내달려서는 아버지를 물로 이끌어다가 놓아주는데 강가에 도착하자 주변에는 아버지의 무용담 속 등장했던 지인들이 모두 나와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다. 물론 이는 그간 주인공이 아들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아들이 각색해서 아버지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이것을 듣고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하는 아버지의 눈에는 감동어린 눈물이 가득 고인다. 그렇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다.

- 아버지가 하는 매 이야기들은 되게 뜬금없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아들이 듣기에 아버지의 이야기는 항상 과장되고 허풍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것에 대해 아들이 비난하자 아버지는 이런 이야기를 이런식으로 하지 않고 사실만을 따분하게 이야기하면 상대방이 듣겠냐고, 너는 어떤 방식을 선택하겠느냐고 되묻는다. 영화에서 확실히 나오진 않지만 장례식에 참석하는 사람들만 보면 아버지의 이야기는 약간의 과장만 더해졌을 뿐 대체로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러한 이야기들을 이런 극적인 요소를 모두 빼고 사실대로만 쏟아내었더라면 아주 따분했을 것 같다.

- 아버지는 항상 물을 챙겨서 마시고 있다. 아픈 와중에도, 맨 마지막 장면에서 스포츠 카를 타고 아들과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순간에도 항상 물은 챙겨마신다. 무슨 뜻일까?

- 서커스 단장이 늑대인간인 것을 들키던 순간 서커스 단원은 주인공을 공격하는 서커스 단장을 쏘기 직전에 눈물 한 방울을 흘리고 있다. 삐애로 분장을 하고 뜬금없이 서서 큰 눈물 한방울을 떨구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 중간중간 아버지가 뜬금없이 인생 교훈을 말하곤 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잡히지 않는 여인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혼 반지를 주는 것이다.
     실수했으면 솔직할 줄 알아야 한다.
     놓친 물고기가 더 아깝게 느껴지는 법이다.

- 물고기가 지칭하는 대상은 당연히 주인공이지만 잠깐씩 대상이 아내 등으로 바뀌기도 하는 것 같다.


줄거리 외적으로 주목한 것들

장면마다 발상이 되게 독특하고 색채가 화려하다. 중간중간에 뜻을 알 수 없는 여러가지 소재가 켜켜이 쌓여서 나중의 어떤 장면과 이어지는 듯한 요소들이 가득한데 다 이해하지 못해서 후에 다시 천천히 처음부터 공부하듯이 보기도 했다. 문장 그대로만 보면 덜 깬 채로 남이 한 이야기를 듣는 듯한 앞뒤가 안 맞는듯한 내용이지만 각각을 이어서 속 뜻을 짚어보면 내포된 인생관은 일관되고 타당하다.

장면끼리 이어지는 모습이 되게 딱딱하다. 연극처럼 막이 내렸다가 다시 오르는 듯이 딱딱하게 이어지는 느낌인데 덕분에 만화영화나 연극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이것도 아마 동화와 같은 인상을 주기 위해 일부러 의도한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상징적인 무언가들을 많이 사용했다. 아버지의 로망은 빨간색 스포츠카였고, 어머니의 사랑의 상징은 황수선화 등이 기억난다. 이러한 상징적인 이미지와 사건들이 큰 단위로 이어지는데 이 덕분에 장면끼리의 연결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아마도 의도한 듯하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어머니의 전갈을 받고 주인공 부부가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구성이 까뮈 이방인이나 시네마 천국과 굉장히 비슷하다. 오마쥬 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아버지의 죽는 장면을 묻는 질문이 계속 반복되다가 맨 마지막에 드디어 드러나는데 이 방식은 how I met your mother이라는 미국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다. 여러 요소들이 맨 마지막에 마치 복잡한 교차로에서 모든 차들이 찰나에 마주치는 것처럼 쨍 하고 함께 다같이 어우러져서 모든게 딱딱 맞아떨어지면서 말미를 장식하는데 그때만큼의 감동을 느꼈다.


후감

영화는 아마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세상에 도전했던 아버지의 삶에 주제를 담고자 한 듯하다. 하지만 그 보다도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 나는 더 주목했다.
그간 장례식에 대해서 이별의 슬픔을 위로받고 정리한 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남은 자들만의 의식으로만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죽은자는 장례식이 어떤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남은자들이 망자를 떠올려서 내가 그의 최후를 어떻게 마무리지어줬다는 의식적 책임감을 위한 것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영화 덕분에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그들 머릿속에서 자신의 장례식을 떠올리며 회고하는 순간이 삶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어떤 역할을 할 지, 그리고 떠나는 자들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마지막 장면을 바라보는 남은 자들에게는 이 죽음이 또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 등 양방향으로 죽음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특히 이 두번째에 대해서는 난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죽음이야말로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죽음은 막연히 고통과 병 끝에 찾아오는 어두운 속성이라고들 생각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죽음이 있고 마감이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이 순간이 유한성을 띄고 덕분에 그 전까지 내가 하고 싶은걸 마쳐야겠다는 동기를 부여받기도 한다.
우리가 존속하는 순간은 한정적이고 우리도 곧 죽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비로소 삶이 소중하다는 걸 깨우친다고도 생각한다.
마치 무한한 한강물은 가치가 없어보이지만 이를 정제해서 예쁜 페트병에 담으면 고급 음용수가 되는 것처럼.


글이야 모든 공간을 다 꾸밀 필요 없이 어느정도 막연한 영역으로 남겨두고 감상하는 사람에게 알아서 채우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영상매체는 그걸 잘못하면 굉장히 엉성하고 볼품없는 작품이 되어버린다. 이 점에서 개연성있게 그 넓은 프레임을 까득 채운 모습에서 되게 용량이 큰, 빼곡한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오랜만에 되게 드물게 영상매체를 예술품과 연관짓는 경험을 했다.

아직도 여운이 가득하게 남아있다. 당분간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 것 같은 장면들이 유독 많았던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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