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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빌리 앨리엇

20/03/29

예술이 품는 의의 중에서 내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문자언어의 객관성이 담지 못하는 추상적인 영역을 표현하는 언어적인 역할에 있다. 자신의 심상을 자신만의 언어로 암호화 한 작품의 표현을 보고서 나는 내 나름대로 나의 언어를 통해 복호화하는데 그 와중에 찡한 마음을 느끼는 순간이 오면 나는 감동한다. 동시에 나와 같은 갈래로 복호화 한 다른 감상자에게서도 동질감을 느끼고 애착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좀처럼 예술이라는 느낌을 느끼지 못하는데, 예술성을 추구하지 않는 상업영화를 주로 접하는 데에 가장 큰 이유가 있을테고, 두번째로는 CDMA 단말기 정도에 지나지 않는 데이터 처리능력을 지닌 내가 5G 중계기에서 보내는 막대한 신호를 처리하는 것과 같은 상황 때문인 것 같다. 내겐 영화 매 장면마다 담겨있는 정보가 벅찰 정도로 너무 많다. 그래서 적절하게 감상하려면 같은 장면을 여러번 보아야 하는데, 동시에 보통 영화의 길이가 상당히 긴지라, 극히 일부 영화만을 이런 식으로 감상해왔다.

내가 빌리 앨리엇에서 해석한 주요 주제를 뽑자면 성취, 가족애, 정 정도가 되겠다.

무뚝뚝하고 표정이 풍부하진 않지만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멋진 아버지, 실제로 등장하진 않지만 피아노 등의 유품과 집안의 분위기, 가족 전반적으로 느끼는 그리움 등에서 묻어나오는 존재감의 어머니, 못 살게 구는 듯 하지만 듬직한 형, 집과 한 몸 같이 느껴지는 할머니, 그리고 가족 외에도 윌킨슨 부인, 데비, 마이클 등 공동체의 정, 가족의 헌신, 그리고 이를 양분으로 하여 마지막에 꽃피우는 성취.
근원과 과정, 결론을 맺기까지 등장하는 수많은 소재들 중에 주제를 오염시키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장면 장면이 담백하고 한 방향을 보는 듯 했다.

부수적으로 눈여겨본 다음의 내용들.

# 감독이 파란색을 좋아하나보다. 특히 주제와 관련된 주요 인물, 소재 등에 파란색이 굉장히 많이 쓰였다. 소재의 중요도에 따라 색으로 구분해놓는 장치도 좋은 방식일 것 같다. 아마 파란색도 그런 의도가 있지 않을까 싶다. (다만 빌리가 책 훔치는 장면에서 시위대 남자 한명이 도망가다 바지를 내리는데 이 사람 옷이 파란색인게 마음에 걸린다)

# 빌리가 마을을 떠나던 날 윌킨슨 부인을 찾아가는데 발레 교습에서 데비는 아직도 지적을 받고 있다. 데비의 집에서 베개싸움을 하고 나서 빌리가 떠날 때에도 데비는 그 장소에 머무른다. 빌리는 성장하고, 발전하는 와중에 나머지는 머물러있다. 이것들이 모두 결말의 성취를 더 강조하기 위한 장치일까 싶기도 하다.

# 장면에 줄곧 등장하는 파란 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아무 말 없이 한구석에 나오다가 마지막 장면 즈음에 드디어 한 마디를 한다. 파란색 원피스는 복선일까 아니면 이 역시도 데비와 같이 머무르는 사물들을 표현한 걸까 둘 다인 걸까

# 중간의 언덕이 굽어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배경으로 빌리의 상황이 주기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빌리의 심정은 춤으로 드러난다. 춤을 추면서 질주하는 그 길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끝없이 펼쳐지기도, 중간이 양철판으로 막혀서 더 달려나갈 수 없게 막혀있기도, 그리고 나중에는 아버지와 함께 손을 잡고 신나게 달려나가기도 한다.

# 이웃간의 왕래에서 정의 요소가 굉장히 많이 보인다. 과연 정을 한국적인 요소로만 표현할 수 있을까. 특히 요즘에 느끼는 것은 내가 기억하던 유년시절의 이웃간 정이란 굳이 한국이어서 존재했었다기 보다는 물질만능주의가 아직 덜 팽배한 사회에서만 맡을 수 있는 범인류적인 여유가 아닌가 한다. 우즈벡에서도, 미국에서 지낼 적에도, 그리고 과거 시점을 그린 이 영화에서도 목격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울에서 이런 느낌을 느껴본 지가 언제였던가, 아니 있긴 했던가 싶다. 이 쯤 되면 각 언어의 단어 중에 정을 표할 수 있는 단어가 하나쯤은 꼭 있을 것만 같다.

# 친구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이국적 요소를 보았노라고 이야기해주었다. 크리스마스때 심각한 분위기 와중에 벽난로 장식과, 종이 왕관 등 세레머니를 위한 구색은 그래도 다 갖춰져있는 모습이며, 왕립발레단에서 온 편지를 빌리가 올 때까지 뜯어보지 않고 테이블에 두고 기다리다가 빌리가 혼자 시간을 갖고 볼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장면 등.


상대적으로 저평가해왔던 영화 장르에 대해서 다시 환기해볼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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